지금 독후감을 쓰고는 있지만 이 책에 대해서 뭘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 명문장도 많고, 생각해볼 것들도 많고 왜 소위 말하는 인생책이나 명작으로 거론되는지도 알 것 같은데 그런 생각들이 어느 명료한 문장들로 출력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해 완성된 문장을 쓴다는 건 지금으로선 불가능하다. 만약에 꾸역꾸역 썼더라도 그건 굉장히 섣부르고 성급한 행동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많은 내용이 나온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이라는 양극단에 있는 이념 속에서 겪는 심리적인 것들, 테레자 모녀의 관계, 키치(kitsch,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기 싫은 건 지우는 태도),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의 수많은 저울질 등. 분명히 삶에서 마주하는 많은 부분들을 썼기 때문에 그리 낯설 것도 아님에도 이 책은 굉장히 낯설다. 그래서 난 이 책에 대한 어떤 코멘트라도 써보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쓰지 못하고 다른 말들만 하고 있다. 내가 체코 역사(프라하의 봄)에 대해 잘 몰라서인지, 밀란 쿤데라의 사상 세계를 몰라서 그런 건지,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인생의 경험치가 아직 쌓이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열 번은 읽어봐야 이 책이 어떤 말을 하려는지 겨우 깨달을 것 같다는 것이다.
내가 밑줄은 쳐도 책에 메모는 잘 하지 않는 편인데, 이 책은 메모를 한 몇 안 되는 책이다. 내가 메모하며 읽은 책 중 한 권은 <안나 카레니나>였는데, <안나 카레니나>는 내가 작품 위에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자신만만하게 메모를 했었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처음에는 메모하며 읽었지만 나중에는 무엇을 어떻게 메모해야 할지도 감이 안 잡히는 그런 책이었다. 두 권 다 삶에 있어 10년 주기로 재독할 생각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다 아는 내용을 되새기는 느낌이라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20대의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30대의 내가 이해하라고 넘기고, 30대의 내가 이해하지 못하면 40대의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넘기기 위해 반복하여 읽는 책이 될 것 같다. 30대가 되기 전까지 다른 책도 읽고, 삶의 경험이 더 생기고, 사고가 더 깊어지고 밀란 쿤데라의 다른 작품들을 보며 축적의 시간을 보내야 겠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읽으면, 그때는 완전히 이해하고 이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부디 그렇기를 바란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 <소년이 온다> 마지막 페이지
이 책에 대한 나의 코멘트
이 책은 한강 작가님이 노벨상을 수상하시는 데 상당히 기여를 한 작품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한강 작가님의 작품들에 붙인 코멘트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이었다. 중학교 때 한강 작가님께서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수상하셔서 잠시 주목받았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나는 채식주의자를 읽고 김기덕 감독을 떠올렸다. 개인적으로 김기덕 감독의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지금도 (김기덕 개인의 인성을 떠나) 김기덕이 이 작품을 영화화했더라면 베를린이나 베니스에 출품할 수 있는 수작이 나왔으리라 생각한다. 여튼 그 당시에는 원래 이런 분위기로 쓰시는 분이구나, 내 스타일은 아니네 생각하고 넘겼는데 그로부터 8년 정도가 지나 노벨상을 수상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벨상 발표 한 달 전엔가 교보문고에서 다음 노벨상 수상자 맞춰보는 이벤트를 진행했었는데, 그때 나는 한강 작가님의 작품을 하나 밖에 읽지 못했던 상황임에도 한강 작가님에 투표를 했었다. 근데 웬걸, 진짜로 받은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다른 작품들을 읽어 볼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수상 이후 책을 구하기 힘들었던 것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몰려들 때 비집고 들어가 사는 것도 굉장히 귀찮고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다 노벨상 수상의 열기가 조금은 식은 때 12.3 내란을 겪으며 생각이 달라졌다. 더 이상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는 것을 미루지 않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12월 어느 퇴근길에 동네 서점에 바로 가서 <소년이 온다>를 구매했었다. 이 책을 구매한 건 윤석열 탄핵 전이었고, 완독한 건 제22대 대선 전이었다. 이 사이에 내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단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개종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지만 개종의 결정타가 되었던 사건은 12.3 내란이었다. 본래 한국 개신교가 교회의 역할을 상실하기 시작한 건 출석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실상을 보니 무시하고 다닐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교회 이름만 가려놓으면 사이비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교회들도 굉장히 많았고, 이런 문제가 있는 걸 알고 있음에도 기도하는 것 외에는 전혀 고치려는 의도가 보이지 않았다. 목사들은 아예 윤석열을 옹호하던가, 그게 아니면 "대통령을 비판하지 말고 회개를 위해 기도하라"는 헛소리를 하고 있었고, 그 헛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동의하고 믿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그리스도인이기 이전에 민주주의에 걸맞는 상식적인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한국 개신교는 사회악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반면 가톨릭 신부님들은 달랐다. "지X발광"이라고 강도높은 비판을 하는 신부님도 있었고, 탄핵 시국선언에 참여하거나 강론에서 이 사태에 대해 비판을 던지는 신부님들도 계셨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이 사태에 대해 굉장히 놀랐다고 하셨고,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님도 꽤 늦은 시기이긴 했지만 탄핵을 촉구하셨다. 나는 그런 가톨릭의 목소리가 민주주의에 더 합당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특히 감명깊게 생각했던 부분은 이런 목소리를 내는 기반이 가톨릭 교회에 내려오는 <사회교리>에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나는 개종을 했고, 이후 탄핵 집회와 시국 미사에 참석하며 많은 곳에 탄핵에 대한 목소리를 냈다. 아직도 500년 전을 거들먹거리며 가톨릭이 개혁하지 못해 개신교가 개혁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러나 타락을 500년 동안 고쳐나가기 위해 노력한 가톨릭 교회와 500년 동안 타락만 해가는 개신교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고쳐야 할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나락으로 추락하는 한국 개신교보다는 부끄러운 흑역사를 고치고 유신 정권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그러니까 고쳐야 할 것을 열심히 고쳐나가며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목소리를 내는 한국 가톨릭 교회를 택했을 뿐이다. 정치적으로는 보수 성향이었지만 박정희의 유신에 대해서는 비판적 목소리를 던지고 사람들을 보호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처럼 말이다.
글을 쓰다보니 관련이 적은 이야기로 흐른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난 개종을 했고, 탄핵 집회와 시국미사에 참석했다. 그 집회들에 참석하며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흘린 많은 분들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경외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최소한 시위를 하면서 총을 맞거나 고문을 당할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됐었던 것은 분명 그분들의 희생으로 이뤄낸 최소한의 자유 덕분임이 분명하니까. 12.3 내란 이전에도 이론으로 배운 것들 덕분에 그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고 민주주의의 참된 일원으로서 참정권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음에 늘 감사하는 마음은 갖고 있었다. 그래서 투표도 놓치지 않고 하고, 집회와 결사의 자유도 열심히 행사했다. 그러나 실례를 겪은 적이 없으니 피상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게 피부에 깊숙이 와닿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탄핵 시국에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달랐다. 너무나 절실하게 와닿았다. 책보다는 영상 예술이 더 실감난다는 건 나의 선입견에 불과했던 것이다.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던져진 이번 경험 덕분에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이 책을 어느 영상물보다도 더 영상처럼, 분명 글자는 2D인데 2D가 아닌 4D 세계에 직접 들어온 것 같은 기분으로 이 책을 묵상하며 읽을 수 있었다.
완독하고 나니 탄핵이 됐고 대선을 앞두게 되었다. 이후 대통령이 누구냐를 떠나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 미완성의 상태이다. 사람으로 치면 갓 태어난 핏덩이, 병에 걸리기도 쉽고 눈에 늘 담고 있어야 하는 그런 아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4.19 혁명과 이후 여러 민주화 운동이라는 혹독한 산고 끝에 태어난 갓난 아기인 한국 민주주의는 2025년에 이제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겼을 뿐이다. 아이는 커가며 더 많은 일들을 겪을 것이다. 흑심을 품은 어른들의 손에 유괴될 수도 있고, 파시즘과 같은 전염력 강한 병균에 감염되어 혹독한 병고를 겪게될 수도 있다. 그러니 더욱 정신차리고 아이를 지켜야 한다. 이 아이의 부모이자 아이를 지켜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국민이다. 부모인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지키지 않는다면 이 아이는 언제 죽어도 죽을 것이다. 중간중간 피를 흘리게 될 수도, 머리를 쥐어짜는 듯한 고통을 가져다줄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필사적으로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4.19 때 처럼, 5.18때 처럼, 6월 민주항쟁 때 처럼. 그리고 2024년 12월에 우리가 했던 것처럼.
와닿았던 부분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너무 많은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그 피를 그냥 덮으란 말입니까. 먼저 가신 혼들이 눈을 뜨고 우릴 지켜보고 있습니다.
(대통령 사진을 보며) 얼굴은 어떻게 내면을 숨기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어떻게 무감각을, 잔인성을, 살인을 숨기는가.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에 둔감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더 두려웠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일단 분명히 해 두려는 것 같았습니다. 내 삶의 어떤 것도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허용되는 건 오직 미칠 듯한 통증, 오줌똥을 지리도록 끔찍한 통증뿐이라는 것을.
하루도 빠짐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왜 그는 죽었고, 아직 나는 살아 있는지.
그가 혼자서 겪은 일들을 그 자신에게서 듣지 않는 한, 어떻게 그의 죽음이 부검될 수 있습니까?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럽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했지만, 동시에 언제나 서로의 얼굴을 후려치고 싶어했습니다. 지우고 싶어했습니다. 영원히 밀어내고 싶어했습니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완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내가 밤낮없이 짊어지고 잇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우리는 고귀해 ... 헌법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고귀해. 그리고 노동법에 따르면 우리에겐 정당한 권리가 있어 ... 이 법을 위해 죽은 사람이 있어.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가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사실 난 인생을 다루는 작품들 위주로 읽느라 로맨스 작품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었다. 그게 성애적인 사랑을 전혀 안 받아봐서인지, 그런 걸 소재로 삼은 아류작들이 너무 많아 질린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로맨스물이 와닿는다기 보다는 나에게는 전혀 공감되지 않을 어느 판타지 소설이나 판타지 영화의 한 장르처럼 느껴질 때도 많다. 이제는 그런 감정을 넘어 내가 성애적인 사랑을 누군가한테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없지만.
그래도 영화를 볼 때는 성애적인 사랑을 다룬 작품들을 많이 찾는 편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를 나열해보자. <헤어질 결심>, <색, 계>, <만추>, <윤희에게>, <화양연화>, <중경삼림>, <아가씨>, <퐁네프의 연인들>, <냉정과 열정 사이>. 크쥐시토프 키예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시리즈라던가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같은 작품들도 이 라인에 끼워야 겠다. 사실 이런 작품을 찾는 건 박스오피스 영화를 주로 보던 학창시절에도 동일했다. <나의 소녀시대>나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소년 시절의 너>, <장난스런 키스>, <이프 온리>, <어바웃 타임>, <나우 이즈 굿>, <트와일라잇 시리즈>, <노트북> 등과 같은 유치뽕짝하기도 하고 아이코닉하기도 한 그런 로맨스물들.
무튼 나는 성애적인 사랑물과 거리를 두고 1-2년 정도 보냈다. 인생에 대해 무겁고 난해하게 다룬 책들을 좋아하고 그쪽이 더 공감가기도 해서 그런 쪽으로 자주 읽어왔는데 그게 질리기 시작했고, 로맨스물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쪽으로 읽어본 적이 거의 없으니 어떤 작품을 읽어야 할지 감도 못 잡겠더라. 그러다가 평소에 즐겨보는 블로거 - <희랍어 시간> 독서록에서 언급한 그 블로거 분 맞다 - 분이 계시는데, 그 블로거 분이 언급한 작품을 보거나 읽으면 나와도 너무 잘 맞아서 그분이 읽었다 하면 무조건 따라 읽는 편인데 <히로시마 내 사랑>도 언급된 작품 중 하나였다. 로맨스물을 찾고 있던 와중 그분이 언급해주셔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보통 같으면 읽으면서 페이지를 접든 밑줄을 치든 할 것 같은데, 이 책은 읽으면서 아주 먼 훗날에 두고두고 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책은 나중에 읽을 때 더 많이 와닿고 깊게 느낄 수 있을 그런 작품이 되리라고 생각했었다. 이 책은 내가 읽어왔던 책들처럼 읽으면서 어느 대사 하나가 사람을 끌리게 하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 같은 것들이 나를 당기는 느낌이었다. 내 취향이 아닌데도 아껴 읽고 싶고,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이었다.
이 책은 실제 영화를 위한 각본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꼭 보고 싶은 영화이다. 될 수 있으면 프랑스 파리 예술 영화관에서 보고 싶다. 그리고 이 책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즈음에, 조금 흐린 날에 세느 강 근처 벤치에 앉아 읽고 싶은 책이다. 다 읽었지만 아직 다 읽지 않은 느낌을 줬던 책.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잠길 수 있다는 건."
이 책을 읽게 된 계기
한강 작가님 책을 일부 읽긴 했었지만(<소년이 온다>와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 <서랍을 저녁에 넣어 두었다>), 완전히 나를 휘감은 책은 이 책이 유일했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시기는 내 삶에서 꽤나 힘든 시기였다. 그리고 같이 있던 친구가 죽음으로 걸어가던 시기였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탈출구 같은 시간을 가져보고자 1박 2일 호캉스를 해봤는데, 역시나 실패였다. 호텔방이 내게 공허한 공간이었던 적은 많지만 나를 옥죄는 공간은 아니었는데 그 호캉스는 나를 옥죄는 호캉스였다. 친구 혼자 숨쉴 수 있는 시간을 주고자, 그리고 내가 좀 숨 쉴 시간을 받고자 근처 교보문고를 알아본 후 그 교보문고를 향해 혼자 전력질주하며 걸었다. 낮의 여름 공기는 굉장히 숨막히지만 밤의 여름 공기는 나를 숨쉬게 했다. 신선하지 않지만 낮에 머금은 열기를 일부 갖고 있는 그 여름 밤의 공기는 오히려 내게 가습기 같은 존재였달까. 그렇게 달려가 몇 가지 책을 보기 시작했고, 마감 안내 음악이 울릴 때 즈음 살 책을 결정했다. 알리 압달의 <기분 리셋>, <버지니아 울프 단편선>, 그리고 한강 작가님의 <희랍어 시간>.
첫 번째 책은 아는 선생님이 내게 추천해준 책이었다. 이분과는 꽤 자주 연락했었다. 1년 정도 나를 보시더니 내게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내가 낙인이론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나. 사회문화 수업 이후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개념이었다. 고등학교 때 스스로 그 낙인이론이 내 얘기 같다는 생각은 했었다. 너무 큰 실패들이, 악운들이 누적되니 그게 그냥 나 그 자체 같았달까. 무튼 내게 그 낙인이론을 벗어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추천해주신 책이었다. 이 책에 대한 독서록은 추후에 올리도록 하겠다.
두 번째 책과 세 번째 책은 사실 마음에 담아둔 책이었다.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블로거 분이 있는데, 그분의 영화 취향이나 음악 취향, 책 취향이 너무 나랑 잘 맞아서 그분이 읽은 책이라고 하면 무조건 담아뒀다가 나중에 꼭 보는 편이다. 그래서 그분이 읽은 책 중 여러 개를 보다가 그 중 끌렸던 <버지니아 울프 단편선>과 <희랍어 시간>을 구매해서 나오게 되었다.
호텔방에 다시 들어가서의 나의 기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좋은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책을 구매한 후 다시 걸어들어온 호텔방에 들어와 제일 먼저 한 일은 목욕이었다. 제일 좋아하는 블랙로즈 입욕제를 푼 욕조에서 <희랍어 시간>을 읽었다. 욕조에서 올라오는 온수가 내뿜는 수증기는 역시 바깥 공기처럼 덥고 습했다. 그 안에서 읽은 책은 텁텁하지만 물을 머금은 느낌의 내용이었다. 굉장히 몰입하듯 읽기는 했지만 그 책을 사서 읽었던 그 시간 속에 받은 스트레스와 상처를 잊기 위해 그 호캉스가 끝난 이후 이 책을 거의 만져보지 않았다. 그러다 영화 <윤희에게>를 보며 내 진짜 감정을 다시 마주한 이후 <희랍어 시간>을 읽었던 그 시간과 그 시간 속 얻은 응어리진 감정들에서 자유로워진 후 다른 책들을 읽다가 문득 지난 토요일에 이 책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빨리 완독했다. 나 혼자 있는 방 안에서 햇살을 받으며 읽었다. 내 방은 화이트 톤이고, 겨울 햇살은 유난히 하얗다. 어두운 시기에 마주한 이 책은 탈출구이면서 트라우마였지만, 그 시기를 나온 후 밝은 곳에서 읽은 희랍어 시간은 몇 번을 걸쳐 다시 읽고 싶은, 밑줄을 치기도 너무 조심스러운 소중한 책이 되었다.
줄거리
그리스어(희랍어) 수업을 하는 남자 강사와 듣는 수강생 여자의 사랑 이야기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점점 시각을 잃어가는 남자와 점점 말을 잃어가는 여자의 이야기. 이렇게 얘기하면 엄청 설레는 내용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읽으면서 냉정과 열정 사이 같기도 했고, <화양연화>의 첸 부인과 차우를 다시 보는 것 같기도 했고, <헤어질 결심>을 보는 것 같기도 했고, <미스터 션샤인>의 히나와 동매가 생각나기도 했다.
와닿았던 글들
* 이 작품은 하나하나 아로새기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마음 같아선 전체를 필사하고 싶고, 가능한 한 매일, 매주, 매년 음미하고 싶은 글들 투성이어서 밑줄 하나 긋기 힘들었던 책이다. 그래서 이번에 눈에 들어오는 부분만 적어둔다. 나중에 재독하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춘기 때, 저에게도 가장 어려웠던 게 미소였어요. 쾌활하고 자신 있는 태도를 연기해야 한다는 게, 언제든 웃고 인사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저에게는 힘들었어요. 때로는 웃고 인사하는 일이 무슨 노동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사람들의 형식적인 미소를 단 한 순간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은 날도 있었어요. 그럴 땐 ...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무뚝뚝한 표정으로 걷곤 했어요.
모든 사물은 그 자신을 해치는 것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걸 논증하는 부분에서요. 안염이 눈을 파괴해 못 보도록 만들고, 녹이 쇠를 파괴해 완전히 부스러뜨린다고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들과 유비를 이루는 인간의 혼은 왜 그 어리석고 나쁜 속성들로 인해 파괴되지 않는 겁니까?
말했지, 도와달란 말 안 할 테니까, 내 앞길 막지만 말라고. 유학 갈 돈이야. 돈 다 털어주건 말건 아버진 망할 거잖아. 망하고, 또 망하고, 끝까지 망할 거잖아.
내 말이 들리나요? ... 그녀는 그의 말을 똑똑히 듣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는 모른다. 그녀는 그를 똑똑히 보고 있다. 그것 역시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는 모른다. 책상에서 비스듬히 비치는 갓등의 빛을 받아 절반 가까이 그늘진 그의 얼굴을, 그녀는 지금 온 힘을 다해 건너다보고 있다.
세계는 환이고 산다는 건 꿈꾸는 것이다.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있어요. 더이상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어요.
안개 속을 나아가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그 도시의 겨울에 종종 찾아오던, 새벽에 호수에서 시가지로 밀려온 안개가 저녁가지 걷히지 않던 날처럼.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들이 안개에 덮여 흔적도 보이지 않은 회색 건물들 사이를, 축축한 석벽에 바싹 몸을 붙이고 천천히 걸어야 하던밤처럼. 아무도 자전거를 타지 않던 밤, 사람의 자취 없이 무거운 발소리들만 들려오던 밤, 아무리 더 나아가도 싸늘한 집에 다다를 수 없을 것 같던 밤처럼.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그녀가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날, 그 뜨거운 아스팔트에 납작하게 달라붙어 있던 백구는 왜 그녀를 물었던 걸까? 그것이 그에겐 마지막 순간이었는데. 왜 그토록 세게, 온 힘을 다해 그녀의 살을 물어뜯었을까. 왜 그토록 어리석게. 그녀는 끝까지 그를 껴안으려고 했을까.
어두운 초록색 흑판에 백묵으로 문장을 쓸 때 나는 공포를 느껴요. 방금 내가 쓴 글씨지만, 십 센티미터 이상 눈에서 떨어지면 보이지 않아요. 암기한 대로 소리내어 읽을 때 공포를 느껴요. 태연하게 내 혀와 이와 목구멍으로 발음된 모든 음운들에 공포를 느껴요. 내 목소리가 퍼져나가는 공간의 침묵에 공포를 느껴요. 한번 퍼져나가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단어들, 나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단어들에 공포를 느껴요.
어둑한 창밖을 보며 생각했지요. 이제부터 환해지는 걸까. 아니면 밤이 되는 걸까.
아무것도 잘 기억나지 않아요. 이탈리아의 다른 어ㄸ너 것도. 미술품이며 성당, 음식 같은 것도. 단지 거기, 카타콤베 묘지만은 잊을 수 없어요.
제 눈이 이렇게 나쁘다는 걸 아카데미에선 모릅니다. 굳이 알려야 할 필요가 없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말을 끊는다. 그녀는 캄캄한 창밖의 전신주를 내다본다. 빽빽하게 얽힌 검은 전선들이 고압의 전류를 숨긴 채 침묵을 지키고 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라고 그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의미없는 부탁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녀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다. 연필을 쥔 손에 힘을 준다. 고개를 더 수그린다. 단어들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입술을 잃은 단어들, 이뿌리와 혀를 잃은 단어들, 목구멍과 숨을 잃은 단어들이 잡히지 않는다. 몸이 없는 헛것처럼, 형체가 만져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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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난 한국문학을 굉장히 피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박경리, 박완서 등 수능에 나올 법한 글들은 더더욱. 근데 이 책은 나의 인생책이 되었다.
내가 <희랍어 시간> 속 인물들과 비슷한 감정을 겪어본 적이 있어서 그런가 다른 한강 작가님 책보다 더 깊게 묵상하며 읽었다.
너무 어둡지도, 너무 밝지도 않은 날과 장소에 가는 날 다시 읽을 생각이다. 영국 런던의 호텔방이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읽고 싶다.
이 책의 제목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었다. 그냥 불륜남과 불륜녀의 연애, 그리고 그 불륜녀가 자살하는 결말을 가진 이야기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2024년에 김윤아 솔로 콘서트에서 이 구절(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을 보고 책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또 네 달 정도를 잊고 지내다가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들고 읽었는데 너무 흥미롭게 느껴졌고 더 이상 이 책을 읽는 것을 미루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점에서 이 책을 사기로 결심한 그날 인터넷으로 3권 세트를 주문했고, 약 1년 동안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마음먹으면 1-2주일 안이면 읽는 분량이지만 처음 1-2권까지 열심히 읽다가 너무 길게 느껴져서 다른 책과 병렬독서를 하다보니 3권은 25년 상반기에 마무리지었다.
줄거리
이야기1) 안나 카레니나는 카레닌과 형식적인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녀는 다리야와 스티바 집안의 불륜 문제 해결을 위해 모스크바에 갔다가 브론스키와의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 불륜은 곧 러시아 사교계에 소문나게 되고, 안나는 사회적 비난과 남편의 냉담한 반응 속에서 점점 고립된다. 결국 안나는 남편과 이혼하지 못한 채 아들과도 떨어지고, 브론스키와 함께 떠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안나는 불안과 질투, 소외감에 시달리다 기차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안나의 이야기는 사랑과 자유를 추구하다 사회적 억압과 자기파괴에 휘말린 여성의 운명을 상징한다. 이야기2) 레빈은 자연과 신앙, 농민과의 관계,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이상주의자이자 지주이다. 키티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며 인생의 많은 면을 배워가는 인물이다. 톨스토이는 자신을 닮은 인물로 레빈을 꼽았다고 한다. 한줄요약: 안나와 레빈의 삶을 병행적으로 그린다. 사랑과 도덕, 인간 존재, 당대 러시아 사회에 대한 고찰을 담은 이야기.
1권
"열애요? 당신은 어떻게 그런 구시대적인 생각을 갖고 있나요? 요즘도 열애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있나요?" 대사 부인이 말했다. "어쩝니까? 그런 어리석은 구시대적 방식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데요." 브론스키가 말했다. "그런 방식을 고수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좋지 않아요. 내가 알기로 오직 이성에 따른 결혼만이 행복할 수 있어요." "그래요. 하지만 그 대신 이성에 따른 행복도 종종 먼지처럼 흩어지곤 하잖습니까? 인정받지 못한 그 열정의 출현 탓에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방종한 시기를 보낸 이후를 이성에 따른 결혼이라고 부르죠. 그것은 한 번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홍역과도 같은 거예요." "그렇다면 천연두 접종처럼 사랑을 예방하는 인공 백신도 발견해야 되겠군요."
"난 사랑을 알려면 실수를 저리르고 그것을 고쳐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벳시 공작부인이 말했다. "결혼한 후에도요?" 대사 부인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후회하기에 너무 늦은 때는 없다." 외교관이 영국 속담을 인용했다.
내 생각에는... 사람의 머릿수만큼 그 생각도 가지각색이라면, 마음의 수만큼 사랑의 종류도 다양할 것 같아요."
사랑... 내가 그 말을 싫어하는 건, 그 말이 내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자신의 마음속을 파고들다 보면, 우리는 종종 그 속에서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던 것을 발견하곤 하지.
(2부 -11 전체)
봄은 계획과 설계의 시간이다. 봄의 나무가 물이 한껏 오른 새순 속의 어린 새삭과 가지 들이 어디로 어떻게 뻗어 나갈지 잘 모르는 것처럼.
아마도 그건 내가 자신에게 있는 것에 만족하고 자신에게 없는 것에 한탄하지 않기 때문일 거야.
자네는 그날의 빵이 있는데도 흰 빵을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겠지... 하지만 나는 사랑 없는 인생을 받아들일 수 없어.
(399p)
이 소년의 존재는 브론스키와 안나의 마음속에, 자신들이 지금 빠른 속도로 나아가는 방향이 가야 할 방향으로 멀어지고 있다는 것, 하지만 자신들의 힘으로는 매순간 가야 할 방향에서 점점 더 먼 곳으로 향하는 배를 멈출 수 없다는 것, 이런 어긋남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은 결국 파멸을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나침반을 통해 깨닫는 항해자의 심정을 불러일으켰다.
(402-408p)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올해만큼 직무가 많은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올해 일부러 일거리를 만들고 있다는 것, 그것이 아내와 가족에 대한 감정이나 생각이 든 상자를 열지 않는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 그리고 그런 감정과 생각은 상자 속에 오래 담아 둘수록 점점 더 두려운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만약 누군가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그의 아내의 행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볼 권리를 가졌다 해도, 온화하고 침착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런 질문을 한 사람에게 몹시 화를 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사람들이 그에게 아내의 건강을 묻기라도 하면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아내의 행실과 감정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고, 실제로 그것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448p) '난 나쁜 여자야. 타락한 여자야." 그녀는 생각했다. '난 거짓말을 하는 게 싫어. 난 거짓을 참을 수 없어. 그런데 이런 거짓이 그(남편)에게는 양식이지. 그는 모든 걸 알고, 모든 걸 보고 있어. 저렇게 태연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그가 느끼는 감정은 도대체 어떤 걸까? 그가 나를 죽이려 한다면, 그가 브론스키를 죽이려 한다면, 오히려 난 그를 존경할 텐데. 하지만 아냐. 그에게 필요한 건 거짓과 체면뿐이야.' 안나는 자신이 남편에게 바라는 게 무엇인지, 자신이 남편을 어떻게 보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고 떠들었다. ...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도 안내에 대한 생각을 떨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정신의 운동이 필요했다.
(458p)
(475p)
(479p)
(508p)
2권
콘스탄친 레빈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거나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말이란 그가 본 사물의 아름다움을 앗아 가는 것이었다.
3부-3) 당대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파트
개인의 이해에 토대를 두지 않는 활동은 결코 오래갈 수 없어. 이것은 보편적인 진리이고 철학이자 진리야.
모든 시대를 통틀어 철학의 주요 과제는 바로 개인의 이해와 공공의 이해 사이에 놓인 필연적인 연관을 찾아내는 것이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내가 너의 비교를 바로잡아 줄 필요가 있다는 거야. 자작나무 가지는 누가 꽂아 둔 게 아니라 심거나 씨를 뿌려서 얻은 거야. 그러니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해. 자신의 제도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인지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민족, 그런 민족만이 미래를 가질 수 있고, 그런 민족만이 역사적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
위선은 통찰력이 뛰어난 가장 현명한 사람까지도 어떻게든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의 경우에는 가장 덜떨어진 아이조차 위선자를 알아보고 외면해 버린다.
(80-81p)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한 아이들이 지극히 평범한 아이들을 뿐만 아니라 거칠고 잔인한 기질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못된 아이들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 불어는 가르치지만 인성 교육은 미비했던 당시 귀족들에 대한 지적
(3부-12) 레빈의 고뇌와 심리가 묘사된 파트
하느님은 하루를 주고, 또 힘을 주었다. 하루도 힘도 노동에 바쳐졌고, 보수는 노동 자체에 있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한 노동인가? 노동의 열매는 어떤 것인가? 그러한 생각은 부차적이고 무의미히다.
자 그렇다면 난 무엇을 할 것인가? 난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는 자신의 예전 생활과 자신의 무익한 지식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신의 교양에 대한 거부였다.
또 하나의 생각과 견해는 그가 현재 살고 싶어 하는 삶에 관한 것이었다.
이처럼 옛 생활에서 새로운 생활로 이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물음에서 뱅글뱅글 맴돌았다.
그래, 삶에 대한 나의 시각도 바로 절너 식으로 어느새 바뀌어 버렸지!
어둠에 대한 빛의 완전한 승리인 새벽, 그 새벽이 밝기 전에 흔히 찾아드는 음울한 순간이 시작된 것이다.
그 불면의 밤에 레빈의 마음ㅇ르 휘저어 놓은 모든 것, 그가 내린 모든 결심,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는 농사꾼의 딸과 결혼을 하려 했던 자신의 공상을 떠올리며 혐오감을 느꼈다. 요사이 그를 그토록 괴롭게 짓누르던 삶의 수수께끼가 풀릴 가능성은 오직 그곳에, 맞은편 길로 빠르게 멀어져 가는 그 마차 안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소박한 노동의 생활이 아무리 멋지다 해도, 난 그 생활로 되돌아갈 수 없어. 난 그녀를 사랑해
(3부-13) 알렉세이의 심리가 묘사된 파트
누구도 겉보기에 지극히 냉정하고 신중해 보이는 이 사람이 그 성격의 일반적인 기질과 모순되는 한 가지 약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어린아이나 여자의 눈물을 무심하게 보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눈물만 보면 어찌할 바를 모르며 판단력을 완전히 상실하곤 했다.
그녀에 대한 적의가 솟구치는 것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눈물이 늘 그에게 불러일으키던 정신적 붕괴가 밀물처럼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것을 알았기에, 그 순간 그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지금의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생명의 온갖 현상들을 억누르려고 애쓰며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의 얼굴에는 시체와도 같은 기이한 표정이 떠올랐고, 이 표정은 안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최악의 의혹이 사실임을 확인해 준 아내의 말은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가슴속에 지독한 고통을 불러일으켰다. 그 고통은 그의 기이한 감정으로 인해, 즉 그녀의 눈물이 그에게 불러일으킨 그녀에 대한 육체적 연민으로 인해 더욱더 강해졌다.
하지만 마차 안에 홀로 남게 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이런 연민으로부터, 요사이 그를 괴롭히던 의심과 질투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이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느끼며 놀라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했다. 그는 오랫동안 앓던 이를 뺀 사람이 느꼈음 직한 감정을 맛보았다 ... 환자가 문득 이제 자신을 그토록 오랫동안 괴롭히고 모든 주의를 스스로에게 쏠리게 하던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으며 ...
아픔은 낯설고 지독했다. 그러나 이제 아픔은 사라져 버렸다.
예전에는 그에게 추악한 것으로 보이지 않던 모습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세세한 점들은 그녀가 언제나 타락한 여자였음을 분명히 보여 주었더. '내 삶을 그녀의 삶과 결합하다니, 나의 실수다. 하지만 나의 실수에 나쁜 점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 내가 불행할 리는 없다. 잘뭇을 저지른 건 내가 아니라...' 그는 혼잣말을 했다. '그녀니까. 하지만 난 그녀와 아무 상관없다. 그녀는 나에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와 아들 - 아들에 대한 그의 감정도 그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변하고 말았다 -에게 닥칠 그 모든 것도 더 이상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지금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한 가지는, 그녀의 타락으로 그에게 튄 진흙을 떨어내고 자신의 활동적이고 정직하고 유익한 삶의 길을 계속 걸어 나가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고 가장 점잖고 가장 편리한, 즉 가장 정당한 방식이 될까 하는 문제였다.
그는 결코 그런 종류의 불행에 동정을 보낸 적이 없으며, 남편을 배신한 아내들의 예가 많아질수록 스스로를 높이 평가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불행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행이 나에게 닥쳤다. 문제는 다만 어떻게 하는 것이 이 상황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냐는 것이다.'
(3부-15) 안나의 심리 묘사 전체
남편이나 브론스키와 맺게 될 관계와는 상관없는 그녀만의 왕국이 있다는 것에서 기쁨을 느꼈다. 그 왕국은 바로 아들이었다.
정말 그들은 나를 용서하지 않을까? 모든 것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해해 주지 않으려나?
(3부-16)
알렉세이(그녀는 마음속으로 브론스키를 그렇게 불렀다.)를 만나야 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 사람뿐이야.
122p
똑같은 사물에 대해 그것을 비극적으로 보며 고통을 느낄 수도 있고 그것을 단순하게, 심지어 즐겁게 볼 수도 있어요.
나 자신을 아는 것만큼 다른 사람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난 다른 사람보다 나쁜 사람일까요, 좋은 사람일까요? 내 생각에는 더 못된 인간 같은데.
잠을 자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즐겁게 지내기 위해서도 역시 일을 해야 합니다.
147p
(3부 - 20)
모든 일을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로 명확히 규정하는 그 나름의 법전이 있었기에, 브론스키의 삶은 특별해 행복했다 ... 이러한 규범은 그다지 현명하거나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확실한 것이었다. 그래서 브론스키는 그 규범들을 지키면서 마음의 평안을 느꼈고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다닐 수 있었다. 다만 최근에 자신과 안나의 관계를 보며 브론스키는 자신의 법전이 모든 조건을 충분히 규정하지 못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이 관계의 불분명함이 그를 위협했다.
그는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지금 다시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며 그 말을 하지 않는 게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그 열정이 그의 사랑과 싸울 만큼 그 꿈은 너무나도 강렬한 것이었다.
(3부 - 21): 156, 158, 160, 164
(3부 - 23): 178, 180, 181
(3부 - 24): 184, 187
(3부 - 26): 199, 202
(3부 - 27)
문제는 바로 모든 진보가 권력에 의해서만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농기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우리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권력으로 도입했지요. 농부들은 처음에 저항을 하다가 나중에는 우리를 따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농노제가 폐지된 지금, 우리는 권력을 잃었고 최고의 수준으로 향상되었던 우리의 농업은 가장 야만스럽고 원시적인 형태로 추락하려 합니다. 난 그렇게 생각합니다.
노동자들은 일을 잘하고 싶어 하지 않아요. 좋은 농기구로 일하려는 생각도 없죠. 우리의 노동자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돼지처럼 진탕 마시고 취해 우리들이 준 것을 망가뜨리는 것뿐입니다.
211p
(3부 - 28): 레빈이 교육, 농업 등에 관해 갖는 견해 확인하기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나 뒤떨어진 민중이 자기들에게 낯선 모든 것에 저항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학교가 민중에게 자신들의 물질적 상태를 개선하도록 돕는다는 겁니까? 당신은 학교와 교육이 민중에게 또 다른 필요를 느기게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상황만 더욱 나빠질 뿐입니다. 왜냐하면 민중은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할 테니까요. 덧셈, 뺄셈, 교리문답 같은 지식이 무슨 수로 민중들의 물질적 상태를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건지,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민중은 가난하고 무지하죠.
(스펜서와 관련하여) 그도 교육은 읽고 셈하는 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큰 부와 편리한 생활, 가령 그의 말처럼 자주 씻는 것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니까요.
이론의 면에서는 전적으로 옳지만 러시아의 계급 전체와 최상 계급에 대한 적의의 면에서는 옳다고 할 수 없는 격분에 찬 지주, 자신의 활동에 대한 불만과 이것의 개선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 이 모든 것이 내면의 불안과 해결책이 눈앞에 있다는 기대감으로 어우러졌다.
(3부 - 29): 228~229p
빈곤 대신 만인의 부와 만족이, 적의 대신 화합과 이해의 일치가 필요해. 한마디로 이것은 무혈 혁명이야.
올바른 사상을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으니까. 그래, 이것이야말로 노력할 가치가 있는 목표이지.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의 영혼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해요.
(3부 - 31): 239~242p - 레빈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보기
지금 두 사람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니콜라이의 병, 그리고 가까이 다가온 그의 죽음. 이 생각이 다른 생각들을 압도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이 자신의 마음을 빼앗은 그 생각을 말하지 않는 한, 무슨 말을 하든 그들의 말은 다 거짓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온갖 다양한 생각들이 떠올랐으나, 그 생각들의 결말은 오직 하나, 바로 죽음이었다.
죽음, 모든 것의 피할 수 없는 종말은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띠고서 처음으로 그의 앞에 나타났다.
저기 사랑하는 형 안에 있는 이 죽음은 그가 예전에 생각하던 것처럼 그렇게 멀리 있지 않았다. 죽음은 바로 그 자신 안에도 있었다.
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은 과연 무엇인지, 그는 그것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지금껏 생각해 본 적도 없을 뿐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할 능력도, 용기도 없었다.
'난 일을 하고 있고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지. 그러나 난 모든 것에 끝이 있다는 것, 그것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어.'
정신을 집중할수록, 이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며 자신이 이것을 정말로 잊고 있었고 인생의 작은 한 가지 국면, 즉 죽음은 오기 마련이고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것, 그 무엇도 시작할 가치가 없다는 것, 이것을 구할 방법은 전혀 없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점점 또렷해졌다. 그래, 이것은 무섭긴 하지만 틀림없는 사실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문제가 어느 정도 풀리나 싶더니,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문제, 곧 죽음이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아, 형은 죽어 가고 있다. 아마 내년 봄쯤 죽을 거야. 어떻게 해야 형을 도울 수 있지? 형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난 죽음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지? 난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는데.'
(3부 - 32): 노동,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한 레빈 vs 형의 생각을 들여다보기
레빈은 지나치게 겸손하고 굴종적인 사람은 상대를 거북하게 만들고, 지나치게 까다롭고 트집 잡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곧 상대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깨달았다.
만일 진심만을 말해야 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는 지낼 수 없었다.
그는 이러한 노력이 결국 위선이 되고 만다는 것, 형이 그것을 알아채고 화를 낸다는 것을 끊임없이 느꼈다.
넌 그저 남의 생각을 가져와 그것을 왜곡해서 부적절한 곳에 적용하고 싶어 할 뿐이야 ... 넌 남의 생각을 가져와 그 생각에서 그 힘을 이루는 것은 모두 잘라 버리고는 그것이 무언가 새로운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해.
그래서 사유도 없어지고 가족도 없어지면, 노동도 정리가 되겠지. 하지만 너의 생각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
(도대체 넌 뭘 추구하는 거냐?에 대한 생각) 레빈은 이 말에 갑자기 흥분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속 깊으 ㄴ곳에는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코뮤니즘과 기존 형식들의 균형을 추구하고 싶어 한다는 것, 그것은 아마 불가능하리라는 것, 이 모든 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넌 아무것도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아. 넌 다만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괴짜 행세를 하면서 네가 단순히 농부들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갖고 그 일을 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 할 뿐이야.
넌 신념을 가진 적이 없어. 지금도 그렇고. 넌 그저 네 자존심을 만족시키면 그만이지.
그는 모든 것에서 죽음이나 죽음으로의 접근만을 보았다 ... 바로 이러한 어둠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일이 이 어둠 속에서 그를 이끌어 줄 유일한 끈이라고 느끼며 온 힘을 다해 그것을 붙잡고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 세 사람에게 모두 괴로운 것이었다. ... 이것은 그저 곧 지나갈 일시적은 슬픈 곤경일 거라는 기대가 없었다면, 그들 가운데 그 누구도 이러한 상황에서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브론스키가 이 왕자를 유난히 불쾌하게 느낀 주된 이유는 왕자에게서 무심결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고 오직 그만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 주길 기다리는 안나의 연약함에 굴복하고 말았고 앞으로 일어난 모든 일을 달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그녀의 사랑이 곧 행복이라고 얼마나 많이 되뇌었는지 모른다 ... 그러나 그는 안나를 좇아 모스크바를 떠날 때보다 행복으로부터 훨씬 멀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녀는 추한 모습으로 변했다.
그건 전혀 다른 별개의 교양이었어. 그런 인간들의 교양이란. 그는 그저 교양을 멸시하 권리르 ㄹ얻기 위해 교양을 쌓은 게 분명해. 그런 사람들이 동물적 쾌락 외에 모든 것을 경멸하는 것처럼 말이야.
난 내가 죽어서 나 자신과 당신에게서 벗어날 거라고 생각하면 무척 기뻐요.
268~269p: 안나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꿈에서 봄.
공포와 흥분이 불현듯 고요하고 진지하고 행복한 집중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는 이 변화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기 안에서 새 생명의 움직임을 들었던 것이다.
273~274p
당신과 당신 정부가 생각한 것보다 더 빨리 끝날 거요! 당신들로서는 동물 같은 욕정을 만족시켜야만 할 테니...
그를 동정하며 그의 입장이 되어 보았다. 그러자 그가 가엾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러시아에는 노동자 문제라는 것이 있을 수 없어. 러시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하는 민중과 토지의 관계야.
죽을 때가 되었다는 건 사실이야. 이 모든 게 다 무의미하다는 것도.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전체는 아주 작은 혹성에 핀 작은 곰팡이에 지나지 않아.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의 세상이 무언가 위대한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사상이나 일 같은 것 말이지! 이 모든 건 모래알에 불과해 ... 일단 이것을 분명히 깨닫고 나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든 게 보잘것없이 되어 버리거든. 내가 오늘이나 내일 죽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게 되면, 모든 게 무의미해지고 말지. 그래서 난 나의 사상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해. 하지만 그 사상도 똑같이 부질없어지겠지. 설사 그 사상을 실현한다 해도 그래. 마치 이 암곰을 쫓는 것처럼 말이지. 결국 사람은 단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위해 사냥이나 일에 몰두하며 살아가는 거야.
그래, 난 잘 몰라. 내가 아는 건 오직 우리가 곧 죽게 된다는 점이지.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삶의 매력이 줄어든다는 것을 알아. 하지만 마음은 더 평온해져.
마지막 날에 가까울수록 더 즐거운 법이야.
315p
(4부 - 10): 당대 러시아 사회에 대한 토론 보기
사람들은 언제나 남들이 일부러 자기의 아픈 곳을 골라 때린다고 느끼기 마련이다.
그녀의 천성이 너무나 부패하고 타락하여 파멸 자체를 구원으로 여기고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마음속에는 그가 이혼을 결심하던 날의 모든 적의가 또다시 고개를 드렁ㅆ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있지만,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을 실망시켜서 죄송합니다. 저마다 나름의 충분한 슬픔이 있는 법이죠!
(4부 - 13): 당대 러시아 사회에 대한 토론 보기
결국 논쟁하던 사람들은 서로 오랫동안 기를 쓰고 논쟁한 것이 아주 오래전 논쟁을 시작할 때부터 자기들이 이미 알던 것이며 다만 각자 선호하는 것이 다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성향을 논박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성향을 지칭하기를 꺼리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따금 논쟁을 하다 상대방의 성향을 파악하게 되면 갑자기 자신도 그 성향을 좋아하게 되어 금방 상대의 의견에 동의하게 되는 경험을 했다. 그렇게 되면 논쟁을 쓸모없는 것인 양 사그라지고 만다.
342, 343p
345p
361~364p
369p
372p
377~378p
381~382p
386p
401~404p
(4부 - 22): 407, 410, 411~413p
(4부 - 23): 415~418p
(5부 - 1): 424~426, 429~430p
(5부 - 2): 436, 438p
(5부 - 4): 455~458p
462p
472p
(5부 - 8): 479, 481~482p
(5부 - 9): 485-487p
(5부 - 11)
504p
509p
(5부 - 14): 레빈이 결혼 속에서 갈등을 풀어나가는 방법과 과정을 보면 좋을듯
그는 행복했지만, 그 행복은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예전의 공상에 대한 환멸과 예기치 못한 새로운 매력을 발견했다.
그와 아내의 생활은 별다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가 예전에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던, 하지만 이제는 그의 의지에 반하여 대단히 확고한 중요성을 띠게 된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소한 것들로 꽉 차 있었다.
둘 다 기분이 나쁠 때는, 나중에 그들이 왜 싸웠닌지 기억해 낼 수 없을 만큼 이해하기 힘든 사소한 이유로 충돌이 벌어지곤 했다.
이 신혼 시기 내내 그들이 유난히 생생하게 느낀 감정은 자신을 얽어맨 사슬을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듯한 긴장감이었다.
결혼 후 첫 한 달은 달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두 사람의 기억 속에 그들의 생애에서 가장 괴롭고 모욕적인 사건으로 남았다.
(5부 - 15): 레빈에게 고독이란?/레빈에게 일이란 -> 결혼 전후로 바뀐 인식/레빈이 바라본 당시 러시아 사회
예전에 그에게는 그 일이 삶으로부터의 구원이었다. 예전에 그는 그 일이 없는 자신의 삶은 너무나 우울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그 일이 그에게 꼭 필요한 것이 된 까닭은 삶이 너무 단조롭게 빛나지 않기 위해서였다.
불만에 찬 사람이 자신의 불만에 대해 다른 누군가를, 특히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을 탓하지 않기란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닥칠 활동 시기, 즉 남편의 아내인 동시에 집안의 안주인이 되어 아이들을 낳아 젖을 먹이고 키울 시기에 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그 무시무시한 노동에 대비하여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사랑의 행복과 평안의 순간들 속에서 자책 없이 즐겁게 미래의 보금자리를 엮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5부 - 16): 레빈이 키티와의 갈등을 풀 때의 상황과 심리를 잘 보기
(5부 - 19~20): 종교에 대한 고찰을 잘 보기
19
레빈이 복음서의 잠언을 떠올린 것은, 자신이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했고, 사람이 죽어 갈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침묵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키티가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육체를 간호하고 고통을 덜어 주는 것 외에도 육체적인 간호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몸 상태와 아무 관련이 없는 무언가를 요구했다는 점이다.
남자가 일생에 단 한 번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그의 지난 세월이 헛되지 않았음을, 그 순간을 위한 준비였음을 증명하는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20: 형의 죽음을 대하는 타인의 자세/형의 죽음을 통한 레빈의 가치관 변화/레빈이 느낀 사랑에 대한 소중함
레빈은 이 강렬한 애원과 희망이 니콜라이가 그토록 사랑하는 삶과의 이별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형이 신앙을 부정하게 된 것이 신앙 없이 사는 게 더 편해서가 아니라 세계의 현상에 대한 현대의 과학적인 해석이 그의 신앙을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몰아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병을 고치고 싶은 광기 어린 희망에서 나온 일시적이고 이기적인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의심할 여지 없는, 이전의 희망에 대한 기억조차 사라지게 하는 고통의 현실이 레빈과 키티의 마음속에서, 그리고 병자 자신의 마음속에서 희망을 깨뜨려 버렸다.
내가 그런 희극을 벌인 것은 그녀를 위해서였어 .. 우리만 있는데 자신을 속일 수는 없지. 내가 믿는 것은 바로 이거야.
이상한 것은 그 자신이 완전히 냉담하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다들 그가 반드시 곧 죽으리라는 것, 그가 이미 반쯤 죽은 상태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그가 최대한 빨리 죽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들 이 사실을 감춘 채 그에게 병에 든 약을 주기도 하고 의사를 찾기도 하면서, 그와 자신과 서로를 속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거짓, 혐오스럽고 모욕적이고 불경스러운 거짓이었다. 레빈은 성품의 특성상, 그리고 ㅈ구어가는 사람을 그 누구보다 사랑했기에, 이러한 거짓을 특히 가슴 아프게 느꼈다.
누구나 그의 죽음을 바라는 감정을 겪었다.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오직 병자 뿐이었다.
고통은 일정한 속도로 점점 더 커지면서 본연의 일을 수행했고 그로 하여금 죽음을 준비하게 했다.
그의 생활은 오직 고통과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으로 모아졌다.
(개별적 욕망이 쾌락을 부여하는 육체의 작용을 통해 충족되었던 것) 그러한 결핍과 고통을 충족시킬 수 없었고, 충족을 얻으려는 시도는 새로운 고통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죽음에 대하여) 아예 말을 하지 않고, 습관에 따라 더 이상 실현할 수 없는 욕망의 충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형의 모습과 죽음의 접근은 레빈의 영혼 속에 형이 찾아온 그 가을밤에 자기를 사로잡았던 불가해함에 대한 공포, 죽음의 접근과 불가피함에 대한 공포를 다시 불러일으켰다.
그는 자신이 예전보다 죽음의 의미를 더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죽음의 불가피함이 더욱 두렵게 보였다.
그는 죽음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살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사랑이 그를 절망으로부터 구원했다는 것, 그 사랑이 절망의 위협 아래서 더욱 강해지고 순수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를 사랑과 삶으로 손짓하는 또 하나의 신비가 일어났다.
(5부 - 21): 알렉세이의 상처
그가 도저히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하나로 결합하고 화해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내와 행복하게 산 과거가 그의 마음을 어지럽힌 것은 아니었다. ... 이러한 상황과 도저히 화해시킬 수 없었다.
그 증오는 자신이 나빠서 생긴 것이 아니라 그가 수치스럽고 혐오스러운 불행을 겪고 있어서 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처를 숨기는 것임을 알았다.
그의 절망은 그가 자신의 슬픔을 끌어안은 채 완전히 고독한 존재로 남았다는 자각 때문에 더욱더 강해졌다.
그저 괴로워하는 한 인간으로서 동정해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 그리고 그런 사람은 페테르부르크뿐만 아니라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안나에게 느낀 애착은 그의 마음속에서 사람들과의 진심 어린 관계를 바라는 마지막 욕구를 앗아 갔다.
그에게는 인맥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많았지만 친구라고 할 만한 관계는 없었다.
(아부하는 사람, 밥 한 끼 먹을 사람, 정치에 대해 의논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하여) 그러나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는 관례와 습관에 따라 견고하게 한정된 영역에 국한되었고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상상력이 불러일으킨 개념을 대단히 현실적으로 만들어 다른 개념이나 현실과의 일치를 요구하게끔 하는 느력 내적인 능력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
그는 신을 믿지 않는 자에게 내려질 죽음이 그에게는 없을 거란 생각, 그리고 자신은 가장 완전한 믿음을 갖고 있기에 - 그러한 믿음을 심판하는 척도는 그 자신이었다 - 자신의 영혼에는 더 이상 죄가 없고 자신은 이 지상에서 이미 완전히 구원을 경험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불가능하고 모순된 점을 전혀 보지 못했다. 사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이런 개념이 경박하고 옳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상상으로 만들어 낸 높은 경지라고 해도 그것을 붙잡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이들에게 경멸을 받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멸시할 수 있는 그런 경지를 말이다. 그래서 그는 진정한 구원이라도 되는 양 자신이 상상해 낸 가상의 구원에 매달렸다.
(5부 - 23): 리디야는 유부녀임에도 카레닌을 사랑한다(연민<욕정?), 리디야는 안나를 매우 싫어한다(내로남불, 카레닌에게 상처를 준 사람, 안나에 대한 질투심)
모든 사랑은 진실한 것이 아니라고, 자신은 지금 카렌닌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녀는 자신도 결혼을 한 상태가 아니고 그도 자유로운 몸이라면 하는 공상에 빠진 스스로를 잘 발견하곤 했다.
안나의 편지: 그 관대한 분을 나에 대한 기억으로 고통스럽게 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5부 - 24): 리디야 - 알렉세이(카레닌) - 주변 사람들
즉 승진이 멈춘 것이다 ... 그러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자신은 아직도 그의 출세가 끝났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소모해 버린,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결점과 실수가 더 잘 보여 그것들을 바로잡을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들이 그를 비웃고 있었다는 사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서 적의 외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이런 것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에게는 그녀가 자신에게 호의적인 단 하나의 섬일 뿐 아니라 자신을 에워싼 적의와 조소의 바다 한가운데 있는 유일한 사랑의 섬이었다.
(5부 - 25): 카레닌의 심리 상태
(악을 보지 않는다는 리디야의 말에)그와 반대입니다. 나는 모든 것이 악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게 아닌지...?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어요. 나도 부도덕은 이해할 수 있어요. - 그녀는 무엇이 여자를 부도덕으로 이끄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말에는 전혀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사랑일까요, 나의 친구? 그것이 진심이긴 할까요? 당신이 전에도 용서했고 지금도 용서한다고 쳐요. 하지만 그 천사의 영혼에 영향을 끼칠 권리가 과연 우리에게 있을까요?
당신이 언제나처럼 자신에 대해 잊는다고 쳐요. 그렇지만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안나는 리디야를 질투한다) 그 편지는 리디야 이바노브바 백작부인이 자기 자신에게조차 숨겼던 은밀한 목적을 이루었다. 그 편지는 안나를 마음속 깊은 곳까지 모욕했다.
자책처럼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가 그녀에게 쓴 편지에 대한 기억도 그를 괴롭혔다. 특히 그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았던 그의 용서 ... 그의 심장을 수치와 자책으로 불태웠다.
하지만 도대체 내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그들은 나와 느끼는 방식이 다른가, 사랑하는 방법이 다른가, 결혼하는 방식이 다른가,
그는 자신이 이 세상의 일시적인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삶을 위해서 산다는 것을, 자신의 영혼에는 평화와 사랑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려 애썼다.
(5부 - 26): 알료샤의 심리
자기의 일에 대해 생각하는 편이 좋아요. 명명일은 이성적인 존재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지요. 일을 해야 하는 다른 날과 똑같은 날일 뿐이거든요.
세료쟈는 서글프게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나 도저히 그 대답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5부 - 27): 알료샤의 심리
(알료샤는) 특히 어머니의 죽음은 더더욱 믿지 않았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후에도 산책을 나가면 어머니를 찾곤 했다. 통통하고 우아하고 거은 머리칼을 가진 여자는 모두 어머니였다. 그런 여자를 볼 때면 마음속에 부드러운 감정이 차올랐고, 그 감정이 어찌나 강렬한지 숨이 가쁘고 눈에 눈물이 고일 정도였다.
아버지와 리디야 이바노브바가 어머니는 나쁜 여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설명해 주었을 때도, 그는 여전히 어머니를 찾고 기다렸다.
중요한 것은 상이 아니라 일이란다. 그리고 난 네가 그것을 이해하기를 바란다. 네가 상을 받기 위해 일하고 공부한다면, 그 일은 네게 괴롭게 느껴질 거다. 하지만 내가 그 일을 좋아한다면 넌 그 속에서 자신을 위한 상을 발견하게 될 거다.
아버지는 그와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 마치 자신이 상상해 낸, 책에나 나오는, 그러나 세료쟈와 전혀 닮지 않은 어떤 남자아이를 대하듯 했다. 그래서 세료쟈는 아버지와 있을 때면 늘 바로 그런 책 속의 남자아이인 척하려고 애썼다.
죽음에 대해 세료쟈는 전혀 믿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특히 그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에게 죽음이란 절대로 있을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면 왜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서 똑같이 인정받아 살아 있는 상태로 천국에 갈 수 없는 걸까? 세료쟈는 생각했다. 나쁜 사람들, 즉 세료쟈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죽을 수 있어도, 착한 사람들은 모두 에녹처럼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는 그것을 배울 수 없었다. 그가 배울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마음속에 아버지와 교사가 가르치려 했던 것보다 더 필수적이라고 느껴진 요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요구들은 교육자들의 요구와 대립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그들과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아홉 살의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영혼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은 그에게 귀중한 것이었다. ... 사랑의 열쇠가 없는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의 영혼 속에 들여놓지 않았다.
어머니가 내일 자기 생일에는 더 이상 숨지 말고 그에게 와 주기를 자신의 언어로 기도했다.
(5부 - 28): 브론스키의 심리
사람은 자신의 자세를 바꾸는 것을 방해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다리를 꼰 채 똑같은 자세로 몇 시간이고 계속 앉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다리를 꼰 채 그렇게 앉아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다리는 경련을 일으키고 그가 뻗고 싶어 한느 쪽으로 뒤틀릴 것이다.
(5부 - 32~33): 브론스키-안나의 갈등관계(체면 때문임을 알지만 서로 우기는 느낌)
(브론스키는 이미 안나에 대한 마음이 식은 것 같음)
(안나의 집착광공)
3권
키티로서는 그때 안나가 온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요. 그리고 안나로서는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완전히 반대로 됐어요. 그때 안나는 너무나 행복했고, 키티는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했어요. 완전히 반대죠!
이분이 아니라 이 사람이라는 그 투박한 표현이 키티에게 감동을 주었다.
(6부 - 3): 레빈과 키티의 대화 - 행복, 비교(열등감)에 대한 대화
하지만 최종적인 결론은 형에게 감탄하며 그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기 남편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키티는 그의 이런 거짓말이 형에 대한 사랑에서, 그가 지나칠 정도로 행복한 것에 대한 무안한 감정에서, 특히 한시도 그를 떠난 적이 없는 더 우월해지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이런 점을 사랑했기에 미소를 지은 것이다.
난 행복해. 하지만 나 스스로에게 불만을 느껴.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다른 사람과, 특히 형과 비교할 때면, 나 자신이 열등하게 느껴져.
(6부 - 4): 세르게이가 바렌카에게 느끼는 마음
37p
러시아에서만 쉰 살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노인으로 여길 뿐, 프랑스에서는 쉰 살의 사람들이 자신을 한창때로 생각하고 마흔 살의 사람들은 자신을 청년으로 여긴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6부 - 5): 바르바라(바렌카)-세르게이가 서로에게 느끼는 마음에 대한 묘사가 재밌음
(6부 - 7): 레빈의 질투가 나오는 대목
(6부 - 11): 당시 러시아 사회에 대한 토론/불로소득자에 대한 토론/신분에 따른 빈부격차에 대한 토론이 너무 인상적임
자네는 정말 그런 사치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단 말이야? 그런 인간들은 우리 나라의 세금 징수인들처럼 사람들의 경멸을 들으며 돈을 벌어들여. 그들은 이런 경멸을 무시하면서 나중에는 정직하지 못하게 벌어들인 돈으로 예전에 받은 경멸을 무마하려 하지.
난 솔직히 그 사람이 다른 부유한 상인이나 귀족보다 더 정직하지 못한 인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 사람들도 똑같이 노동과 지혜로 돈을 벌었잖아.
그래, 하지만 무슨 노동? 과연 이권을 손에 넣어 전매하는 것이 노동일가?
물론 노동이지. 그 사람이나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없다면 철도도 없을 거라는 의미에서 노동이라 할 수 있어.
하지만 그것은 농부나 학자의 노동과 달라.
그렇다고 하지. 하지만 그의 활동이 겨록, 즉 철도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노동이야. 하지만 자네는 철도가 무익하다고 생각하지
투입된 노동에 상응하지 않는 획득물은 모두 부정한 거야.
그럼 도대체 누가 그 상응이라는 것을 정하지?
부정한 방법과 간교한 술책으로 얻은 획득물은... 은행의 획득물과도 같은 거야.
그건 악이야. 세금 징수가 그랫던 것처럼, 노동하지 않고 막대한 재산을 획득하는 것이 형태만 바뀐 것뿐이라고 ... 세금 징수 제도를 폐지하자마자 철도, 은행이 등장했어. 그것 역시 노동 없는 돈벌이지.
나는 이 사람들에 대한 사회의 태도에서 아무런 근거도 없는 어떤 적의를 본다네. 내가 생각하기에는 거기에는 질투가...
자네는 내가 5000루블을 얻고 농부가 50루블을 얻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했어. 그 말이 옳아. 그건 부당해. 나도 그 점을 느끼고 있지만...
우리는 먹고 마시고 사냥이나 다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농부는 끝도 없이, 끝도 없이 일을 하니 어찌된 일입니까?
자네는 그것을 느끼면서도 자네의 영지를 농부에게 주지 않는군.
만약 자네가 그 불평등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도대체 왜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거지?
나도 행동하고 있어. 다만 내가 나와 농부 사이에 존재하는 처지의 차이를 더 벌리려 애쓰지 않을 거라는 의미에서 소극적이라 할 수 있지.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는 거지. 현재의 사회구조가 정당하다고 인정하고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애쓰든가, 나처럼 자신이 부당한 우위를 누리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기꺼이 누리든가 말이야.
만일 그것이 정당하지 않다면, 자네는 그 혜택을 기꺼이 누릴 수 없을걸. 적어도 난 그렇게 못할 거야.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잘못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니까.
(6부 - 12): 개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장면 존재(96~98p)
101p
118p
(6부 - 16): 돌리의 시점으로 전개 됨
여자들이 고통 속에서 아이들을 낳도록 저주받았다는 말이 얼마나 불공평한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낳는 건 아무것도 아냐. 하지만 임신하는 것, 그거야말로 괴로운 일이지'
애가 있으면 아무것도 못해요. 그저 짐이 될 뿐이지요.
임신, 입덧, 사고력의 둔화, 모든 것에 대한 무관심, 무엇보다 추한 외모. 키티도, 풋풋하고 예쁘던 그 키티도 얼마나 망가졌어. 나도 임신하면 흉해지겠지. 나도 알아. 분만, 고통,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그 고통, 그 마지막 순간... 그 다음에는 수유, 그 불면의 밤들, 그 무시무시한 아픔...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아이들어 태어날 때마다 거의 늘 경험한, 젖꼭지가 갈라지는 그 아픔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흠칫 떨었다.
그 다음에는 아이들의 병, 그 끝없는 두려움, 그 다음에는 교육, 추악한 기질, 공부, 라틴어, 그 모든 것들이 정말 이해하기 힘들고 어려워.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는 아이들의 죽음이
그러자 또다시 그녀의 마음속에 어머니로서의 마음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쓰라린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럼 그 모든 것은 과연 무엇을 위한 걸까? 그 모든 것으로부터 얻는 게 도대체 뭘가? 난 단 한순간의 평온도 누리지 못한 채 어떨 때는 임신 때문에, 어떨 때는 수유 때문에 끊임없이 화를 내고 불평을 늘어놓고 스스로도 기진맥진해할 뿐 아니라 남까지 괴롭히고 남편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이렇게 평생을 살게 될까, 내 아이들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불행하고 가난한 아이들로 자라고 말 것인가. 지금만 해도 그래. 만약 레빈 부부의 집에서 여름을 보내지 않았다면, 아, 모르겠다.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는 한, 난 혼자 힘으로 아이들을 키울 수 없어. 글쎄, 가장 다행인 경우라고 해 봤자, 아이들이 더 이상 죽지 않는 것, 내가 그럭저럭 아이들을 양육해 나가는 것일까. 기껏해야 그 애들은 겨우 건달이 되지 않는 정도겠지. 그게 내가 바랄 수 있는 전부야. 고작 그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통과 고생이... 인생 전체가 엉망이 되고 말았어!
자신을 향한 얼굴들이 모두 건강하고 즐거워 보였고 생의 기쁨으로 자신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모두들 생을 살아가고 있어... 나만 그렇지 않아. 그런데 사람들은 안나를 공격하고 있어. 무엇 때문에? 과연 내가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 그녀는 살고 싶은 거야. 하느님이 우리의 영혼에 그것을 불어넣었잖아. ... 그런데도 과연 지금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난 그(남편)를 존경하지 않아. 그가 필요할 뿐이야.
안나는 아주 잘한 거야. 그러니 난 결코 그녀를 비난할 수 없어. 그녀는 지금 행복하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고 있어. 그리고 나처럼 짓눌려 있지도 않아.
난 사람들이 내가 무언가를 입증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난 그저 살고 싶을 뿐이에요. 나 자신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불행을 끼치고 싶지 않아요. 나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추상적으로, 이론적으로, 돌리는 안나의 행동을 정당화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찬성하기까지 했다. 일반적으로 나무랄 데 없이 도덕적인 여자들이 종종 그러듯, 도덕적인 생활의 단조로움에 실증 난 그녀는 멀리서 불륜의 사랑을 용서했을 뿐 아니라 안나를 질투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녀는 안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 자신에게는 너무나 새로운 고상한 품격을 갖춘 사람들 틈에서 안나를 본 후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 대체로, 추상적으로, 돌리는 안나의 행동을 지지했다.
(6부 - 21)
163~166p
그녀는 행복해요. 그녀는 현재에 행복해합니다. 하지만 나는요? 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릴지 두렵습니다.
난 그녀가 행복하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렇게 계속될 수 있을까요? 우리의 행동이 옳은가 그른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우리의 처지에 따르는 온갖 조건들과 법이 그렇잖습니까, 숱한 복잡한 일들이 생길 텐데 말이죠, 그녀는 모든 고통과 시련을 겪은 후 이제 겨우 숨을 돌리게 되었는데 상황을 보지도, 보려 하지도 않습니다.
안나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보지 않으려고 자신의 삶에 대해 실눈을 뜨는 것 같았어.
(6부 - 22)
수입을 얻고자 하는 자는 성가신 일도 감수해야 하지요
우리의 권리가 우리에게 부여한 의무를 깨닫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의무를 부정하는 것이구요.
자기보다 뛰어난 배우들과 극장에서 연극을 하는 듯한, 그리고 자신의 서툰 연기가 모든 것을 망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는 동안 그토록 증오했던 어머니로서의 괴로운 걱정들이, 그런 것들 없이 하루를 보낸 지금에 와서는, 다른 빛으로 나타나 그녀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6부 - 23)
만약 내가 불행한 아이들을 낳지 않는 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뭣 하러 나에게 이성이 주어졌겠어요?
그 불행한 아이들 앞에선 난 늘 죄책감을 느낄 거예요. 그 아이들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 애들은 불행해지지 않아요. 그리고 만약 그 애들이 불행해진다면, 그것은 나만의 책임이 될 거예요.
한 표가 모든 문제를 결정할 수도 있어. 그래서 만일 네가 사회적 대의를 위해 일하고 싶다면 진자하고 일관된 자세를 취해야 해.
타성에 의해서만 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퇴락한 제도예요. -> 습관 때문이죠. 그게 전부예요. 그리고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하니까요. -> 솔직히 말하면 나 자신의 이해관계 때문이기도 합니다. -> 저들은 그저 토지 소유자고 우리는 지주입니다. 저들도 귀족들처럼 자신을 죽이고 있지요.
만나는 것조차 괴로운, 적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야.
돈을 얻기 위해서 들인 노동이 돈으로 구입한 것이 주는 만족과 상응하는가 하는 생각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민중의 일반적인 소명에 관해 결론을 내려고 하면 오류에 빠지기 쉽죠
도덕 교육이라고 하셨죠. 당신은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상상도 못할 겁니다! 간신히 한쪽을 때려눕혔다 싶으면 다른 한쪽이 불쑥 올라와 있죠. 그리고 또다시 싸움이 시작됩니다.
아름답기도 했지만 불쾌하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전혀 예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즐겅무도, 슬픔도, 비탄도, 부드러움도, 의기양양함도 미치광이의 감정처럼 아무런 명분 없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미치광이의 경우와 똑같이, 이러한 감정은 예기치 않게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일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라요. 처음에 사람들은 꾸며 낸, 양식화된 인물드로부터 자신의 conception을 구축하지만 나중에는, 그러니까 모든 combinaisons이 다 나오면 마링에요, 꾸며 낸 인물을 지루하게 여기고 보다 자연스럽고 정확한 인물을 생각해 내기 시작하죠.
사랑에 크고 작고가 어디 있어요. 이런 사랑으로는 내 딸을 사랑하고 저런 사랑으로는 저 애를 사랑하는 거죠.
에너지는 사랑을 토대로 해요. 그런데 사랑은 어디에서나 얻거나 명령으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학교나, 대체로 그런 유의 제도에는 마음을 쏟을 수가 없죠. 내 생각에는 그런 자선사업이 늘 그처럼 미미한 결과를 낳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농민들이 술을 마신다고 말하지. 하지만 농민과 우리 계급 중 어느 쪽이 술을 더 많이 마시는지 모르겠어. 농민들은 축일에나 마시지만...
과연 내가 살아 있기나 한 걸까? 이건 사는 게 아냐. 그저 결말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지. 계속 지연되고 또 지연되는 결말을... 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고,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난 나 자신을 억누르고, 나 자신을 위해 ... 소일거리를 만들며 기다릴 뿐이지. 하지만 그 모든 건 속임수일 뿐. 모든 게 모르핀과 다를 바 없어.
사람이 익숙해질 수 없는 환경은 없다. 특히 주위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살아가는 것을 볼 때는 더욱 그렇다.
그녀는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그 고통 속에서 승리를 쟁취하고 그 속에서 기뻐하며 그것을 사랑했다. 그는 그녀의 영혼 속에서 아름다운 무언가가 완성되고 있음을 보았다.
자신의 모든 의심뿐 아니라 자신이 내면에서 인식하고 있던 불가능성, 즉 이성을 통해서는 믿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까지도 자신이 신에게 호소하는 것을 결코 방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자신을, 자신의 영혼을, 자신의 사랑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는 듯한 그 존재에 호소하지 않는다면, 과연 누구에게 호소해야 한단 말인가?
아무도 그의 감정을 모르며 알아야 할 의무도 없다는 것, 그 무관심의 벽을 뚫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침착하고 사려깊고 단호하게 행동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슬픔이었고, 이것은 기쁨이었다. 하지만 그 슬픔이든, 이 기쁨이든 다 똑같이 삶의 일상적인 조건을 벗어나 있었고, 그것들은 마치 숭고한 무언가가 엿보이는, 일상 속의 틈새와도 같았다. 그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도 똑같이 괴롭고 고통스럽게 시작되었으며, 영혼은 그 숭고한 것을 직관할 때와 똑같이 불가해한 방식으로 예전에는 결코 파악할 수 없었던 경지까지, 이미 이성이 쫓아갈 수 없는 곳까지 솟아올랐다.
하지만 아기는? 어디에서 무엇 때문에 왔으며,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런 생각에 익숙해질 수 없었다. 아기는 그에게 불필요한 무언가로, 지나친 과잉으로 여겨졌다.
이 자그마한 존재에게서 느낀 감정은 그가 기대한 것과 전혀 달랐다. 그 감정 속에는 즐거움도 기쁨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새롭고도 고통스러운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나약함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대한 인식이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그러한 인식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이 무기력한 존재가 고통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너무 커서, 그는 아기가 재채기를 할 때 느낀 뜻모를 기쁨과 자부심이라는 기이한 감정들마저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 자질을 모두 갖춘 사람은 없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정직하지 못한 사람보다는 정직한 사람이 그 자리에 앉는 편이 더 나았다.
정직함이란 소극적 자질에 불과하지요.
그 애는 모든 것을 단념했지. 하지만 현실이, 시간이 가르쳐 준 거야. 그 애의 처지가 고통스럽고 참을 수 없는 것이라는 걸....그 애의 처지는 그 애에게도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그 누구에게도 이로울 게 없어. 자네는 그 애가 자초한 것이라고 말하겠지. 그 애도 그것을 알기에 자네에게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거야.
인간은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
돈이 필요해. 먹고 살아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어. -> 그래도 살아가고 있잖아. -> 살기는 하지. 하지만 빚이 있어.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친구의 마음 상태를 잘 살피지 않으면 안 돼요.
우리는 우리를 위한 때가 왔는지 안 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준비됐는지 안 됐는지에 대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은총은 인간의 판단에 따라 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은총은 열심히 노력하는 자에게 내리지 않고 사울처럼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내리곤 합니다.
빛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그저 눈을 감지 않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때로 인간은 자신이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없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는 종교의 숭고함을 인정하면서 자신이 양심을 속이고 있다고 느꼈다.
그에게 친숙하고 익숙한 환경에서는 이런 복잡성을 이해하고 사랑했지만, 이런 낯선 환경에서도 그도 어리둥절하고 말문이 막혔으며 모든 것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가정생활에서 무언가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부부간의 완벽한 불화나 애정 어린 화합이 필요하다. 그러나 부부 관계가 불명확하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닐 경우에는, 아무것도 실행할 수 없게 된다. 많은 가정이 단지 완전한 불화도 화합도 없다는 이유로 부부 모두에게 지긋지긋한 그 묵은 자리에 수년 동안 머무르곤 한다.
그들을 갈라놓은 분노에는 외적인 원인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의논하려 할 때마다 분노가 사라지기는커녕 더 깊어지기만 했다. 그것은 내적인 분노였다.
그녀는 그가 그녀와의 관계를 끊은 후 결혼하고 싶어 하는 가상의 여자를 질투하기도 했다. 이 질투가 무엇보다 그녀를 괴롭혔다.
안나는 질투하면서 그에게 분개했고 모든 것 속에서 분개의 원인을 찾으려 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에 놓인 모든 괴로움에 대해 그를 비난했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그의 탓으로 돌렸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처지에 놓인 모든 괴로움을 이해하고 나를 그 속에서 구해 줄텐데.... 그녀가 시골이 아닌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 것도 그의 잘못이었다.
그녀는 그 누구의 마음과도 가깝지 않은 그런 악의 없는 대화에서 다툼이 일어났다는 것을 오래도록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존중은 말이죠, 사람들이 사랑이 있어야 할 텅 빈 자리를 감추기 위해 궁리해 낸 거예요.
날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고 날 책망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정직하지 못한 사람보다 더 나빠요. 그 사람은 심장이 없는 사람이에요.
난 사랑을 원해. 그런데 사랑이 없어. 그러니 모든 게 끝난 거야. 이제 끝내야 해. 하지만 어떻게?
왜 난 죽지 않았을까? ... 그 순간 그녀는 그녀의 영혼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만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어. 그래, 죽는 거야. 모든 게 죽음으로 구원받을 거야. 죽자. 그러면 그도 뉘우치겠지. 날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게 되겠지. 나 때문에 괴로워도 하겠지. ... 자신이 죽은 후 그가 느낄 감정을 온갖 측면에서 생생히 상상해 보았다.
난 당신의 목에 달린 돌이에요. 난 당신을 괴롭히고 싶지 않아요. 그러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안나, 무엇 때문에 당신 자신과 나를 이토록 괴롭히는 거야?
분명한 건 형식이 아니라 사랑에 있어야죠.
불확실함은 당신에게 내가 자유로운 몸으로 보인다는 데 있어.
아들의 행복과 명예가 어디에 있는지 마음으로 헤아리지 못하는 여자는 심장이 없는 여자예요.
왜, 마음속에 폭풍이 몰아치는 끔찍한 결과를 불러올지 모를 인생의 전환기에 자신이 서 있다고 느끼는 이때, 왜 이런 순간에 자신이 남 앞에서, 조만간 모든 것을 알게 될 다른 사람 앞에서 아무 일도 없는 척하는지, 그녀도 몰랐다.
지금껏 싸움이 하루 종일 지속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것은 오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싸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이 완전히 식었다는 명백한 시인이었다.
잔혹한 사람이 내뱉을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말들, 그는 그녀의 상상 속에서 그녀에게 그 말들을 내뱉었다. 그가 실제로 그 말들을 하기라도 한 양 그의 말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필요한 건 오직 하나, 그를 벌하는 것이었다. 한 병을 다 마시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자, 그것은 그녀에게 너무도 쉽고 간단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이미 때가 늦어 버렸을 때 그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후회하고 그녀에 대한 기억을 사랑하게 될까 하는 달콤한 생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안나는 자신의 처지가 집에서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녀에게는 죽음에 대한 생각도 더 이상 그렇게 무섭거나 또렷하게 다가오지 않았고, 죽음 자체도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우리? 어째서 우리지? 과거를 뿌리째 뽑을 수 없다는 것은 끔찍한 이링야. 그에 대한 기억을 뽑아낼 수는 없어도 감출 수는 있어. 난 감출 거야.
난 정말 바르게 살고 싶어!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어!
저 아가씨들을 몰라. 사랑이 얼마나 쓸쓸하고 비천한 것인지...
그래,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난 모든 걸 잃게 돼. 어쩌면 그는 기차를 놓치고 지금쯤 벌써 돌아와 있을 거야. 넌 다시 비굴해지고 싶은 거니!
그녀는 자신이 사랑이라고 부른 것을 떠올리며 혐오를 느꼈다. 그러자 이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 그 선명함이 그녀를 기쁘게 했다. 나나 ...나 다 마찬가지야. 어디나, 언제나 다 똑같아.
그녀는 자신이 어디로, 왜 가는지 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질문을 이해하는 데만 해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녀는 자기의 처지에 관한 온갖 세세한 점들과 자신이 어느 쪽을 택할지 망설이고 있는 여러 결심들을 조금씩 떠올렸다. 때로는 희망이, 때로는 옛 상처에 대한 비탄이 무섭도록 맥박치는 그녀의 고통스러운 심장의 상처를 자극했다. ... 때로 그녀는 삶이 얼마나 더 행복해질 수 있는지, 자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심정으로 그를 사랑하고 증오하는지, 자기의 심장이 얼마나 무섭게 뛰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인생이 고통이 되지 않을 상황을 내가 생각해 낼 수 없다는 것, 우리 모두 고통 받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 우리 모두 이미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자신을 속일 방법을 계속 궁리하고 있다는 것까지였지.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되면 넌 도대체 뭘 할 건데?
인간에게 이성이 주어진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불안하게 하는 것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죠.
모든 게 진실이 아니야. 모든 게 거짓이고, 모든 게 기만이고, 모든 게 악이야!
저기가 바로 중간이야. 난 그에게 벌을 주고 모든 사람에게서, 나에게서 벗어날 거야.
하느님, 나의 모든 것을 용서하소서!
그래요, 그 여자는 그런 여자가 마땅히 목숨을 끊어야 하는 방식으로 목숨을 끊었어요. 그 여자는 죽음조차도 비열하고 저급한 죽음을 택하더군요 -> 심판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 여자가 그를 해방시켜 준 거죠. 하지만 가엾은 아들은 그녀에게 모든 걸 바쳤어요. 그 애는 모든 걸 버렸죠. 사회적 성공, 나... 그런데도 그 여자는 그 애를 가엾게 생각하지 않고 일부러 그 애를 완전 파멸시킨 거예요.
내가 인간으로서 가진 장점은 나에게 인생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점입니다. 내 안에는 적의 방진으로 쳐들어가 그들을 쳐부수거나 내가 전사하기에 충분한 육체적 힘이 있어요. 난 그것을 압니다. 난 나의 생명을 내놓을 수 있는 목표가 있다는 것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생명이라는 것이 불필요하기보다 역겹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쓸모가 있겠죠.
그는 그녀를 자신의 뇌리에 떠오르던 마지막 순간의 그녀같이 잔혹하고 복수심에 찬 모습이 아니라, 기차역에서 만났을 때처럼 신비롭고 매혹적이고 사랑 가득하고 행복을 갈구하면서도 남에게 행복을 주던 그 모습으로 기억하려 애썼다. 그는 그녀와 보낸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그러한 순간은 독에 오염되어 영원히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그러나 씻을 수 없는 회한을 남긴 채 실현되어 버린 그녀의 의기양양한 협박만을 기억했다.
레빈은 죽음보다 오히려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생명을 더 두려워하게 되었다. 유기체, 유기체의 쇠퇴, 물질의 불멸성, 에너지 보존의 법칙, 진화, 그가 예전에 품은 믿음을 대신한 단어는 이런 것들이었다. 그러한 단어와 그것에 결부된 개념들은 지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대단히 훌륭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생명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난생처음 만난 얼어붙을 듯한 추위 속에서 자신이 벌거숭이나 다름없고 어쩔 수 없이 괴로운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성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온 존재로써 확인하는 사람의 처지가 놓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레빈은 끊임없이 자신의 무지에 대해 이러한 공포를 느꼈다. 게다가 그는 자기가 신념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무지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사고방식이기도 하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있었다.
만약 내가 내 생명에 대해 그리스도교에서 제시하는 답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난 어떤 대답을 인정할 것인가?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념의 병기고를 다 뒤져도 어떤 해답은커녕 해답 비슷한 것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이제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모든 책에서, 모든 대화에서, 모든 사람에게서 그 질문들에 대한 연관성과 해결을 찾고 있었다.
자기처럼 예전의 믿음을 자신이 가진 것과 똑같은 새로운 신념으로 바꾼 후에도 그 속에서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은 채 완전한 만족과 평온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 사람들이 과연 진실한 걸까? 그들이 거짓 행세를 하는 건 아닐가? 그를 사로잡는 질문에 대해 과학이 제시하는 해답을 저들이 나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거나 달리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그는 그 사람들의 견해와 그 해답을 표명한 책들을 열심히 파고들었다.
기억에서 종교는 이미 자신의 시간은 다 살았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을 끌어냄으로써 오류를 점했다는 점이었다.
그가 많은 책들으 읽으면서 확신하게 된 또 한 가지는 그와 똑같은 시각을 공유한 사람들이 그 시각으로는 다른 어떤 것도 말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은 아무것도 해명하지 않은 채 그로서는 해답 없이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질문들을 단순히 부정하기만 하고 그가 흥미를 느낄 수 없는 전혀 다른 문제들, 예를 들면 유기체의 진화나 영혼에 대한 기계론적 설명 등등을 해결하려 애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인위적인 사유 과정을 잊은 채, 삶에서 벗어나 그저 주어진 실을 따라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만족을 준 것으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다 갑자기 카드로 만든 집 같은 그 인위적인 구조물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그 구조물은 삶에서 이성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와 상관없이 그저 치환된 것에 불과한 똑같은 말들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곤 했다.
언젠가 그는 쇼펜하우어를 읽으며 의지라는 말에 들어갈 자리에 사랑을 넣어 보았다. 그러자 그 새로운 철학은 그가 철학을 벗어나기까지 이틀 동안 그를 위로해 주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삶 속에서 그것을 바라보자, 그것 역시 와르르 무너지며, 몸을 따뜻하게 해 주지 못하는 모슬린 옷이었음을 드러냈다.
나중에 가톨릭 필자가 쓴 교회사와 슬라브 정교 필자가 쓴 교회사를 보고 본질상 완전무결한 두 교회가 서로를 부인하는 것을 본 후, 그는 교회에 관한 호먀코프의 이론에도 환멸을 느끼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 구조물도 철학적 구조물과 똑같이 재가 되어 흩어지고 말았다.
과연 내가 무엇인지, 내가 왜 여기 있는지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갈 수는 없어. 그런데 그것을 알 수 없단 말이야. 그러니 난 살 수 없어. 무한한 시간 속에서, 물질의 무한성 속에서, 무한한 공간 속에서 거품 같은 유기체가 분리되어 나온다. 그리고 그 거품은 잠시 버티다 터져 버린다. 그리고 그 거품은, 바로 나. 그것은 고통스러운 거짓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사유가 그 방향으로 수 세기 동안 수고하여 이룬 유일한 최후의 결론이었다. 그것은 거의 전 부문에 걸친 인간 사유의 모든 탐색이 그 토대로 삼은 최후의 믿음이었다. 그것은 지배적인 신념이었다. ... 하지만 그것은 거짓일 뿐 아니라, 어떤 사악한 힘, 사악하고 혐오스럽고 절대 굴복해서는 안 되는 힘의 잔인한 조롱이었다. 그 힘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각자의 손에 달려 있었다. 악에 대한 그런 종속을 끊어야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하지만 레빈은 총으로 자사라지도 않고, 스스로 목을 매지도 않고 여전히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를 생각할 때면, 레빈은 해답을 찾지 못해 절망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자문하기를 멈추는 순간에도 자신은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알 것만 같았다. 왜냐하면 확고하고 분명하게 행동하고 살아갔기 때문이다. 심지어 요즘 같은 때에도 그는 예전보다 훨씬 더 확고하고 분명하게 생활했다.
처음엔 너무나 크게 보였던 활동 자체도 점점 작아지고 작아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곤 했다. 그런데 결혼 후 자신을 위한 생활에 점점 갇히게 된 지금, 그는 비록 자신의 활동을 생각할 때 더 이상 어떤 기쁨도 맛보지 못하게 되었지만 자신의 일에 꼭 필요한 것이라는 확신을 느꼈고 그것이 전보다 훨씬 더 유익해지고 점점 확장되어 가는 것을 목격했다.
가족을 위해 산다는 것, 곧 똑같은 문화적 조건 속에서 똑같이 자녀들을 키우며 산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배가 고플 때 식사를 하는 것만큼이나 필요한 것이었다.
그의 아들도 땅을 물려받았을 때 아버지에게도 감사할 수 있도록 조상의 땅을 잘 보존해야 한다는 것은, 빚이란 응당 갚아야 한다는 것만큼이나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었다.
일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품에 안고 아기를 내동댕이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노동자들을 가능한 싼 임금으로 고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가치보다 더 싼 임금을 선불로 주며 그들을 노예처럼 부리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자기가 잘 처신하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것을 굳이 입증하려 들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해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도 피하려 했다.
추론은 그를 의심으로 이끌었고 그로 하여금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깨닫지 못하게 방해했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때, 그는 자신의 정신 속에서 두 가지 가능한 행위 가운데 어느 것이 좋은지 어느 것이 나쁜지 판단하는 완전무결한 재판관의 존재를 계속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않으면 그 즉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않으면 그 즉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무엇인지, 가기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사는지 인식할 가능성을 전혀 깯다지도 보지도 못하면서, 그러한 무지 때문에 자살을 두려워할 정도로 괴로워하면서, 그와 동시에 인생에서 자신만의 고유하고 일정한 길을 굳건하게 개척해 가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자기희생의 노력은 다른 어떤 일상적 조건에서도 발휘되지 않는 거승로서, 만약 그러한 자질을 보여 주는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갖는다면, 그러한 노력이 해마다 반복되지 않는다면, 그 노력의 결과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면, 그 노력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만일 선이 이유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선이 아니야. 만을 그것이 결과를, 즉 보상을 갖는다면, 그것 역시 선이 아니야. 따라서 선은 원인과 결과의 사슬을 초월해 있어.
난 기적을 찾았고, 날 납득시킬 만한 기적을 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어. 그런데 여기에 기적이, 유일하게 존재할 수 있고 언제나 존재했던, 사방에서 날 에워싼 기적이 있어. 그것을 난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야!
과연 난 모든 것에 대한 해결을 찾아낸 걸까, 정말로 이젠 나의 고통이 끝난 걸까?
무엇이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일까? 난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
물리적, 화학적, 생리적 법칙에 따라 물질의 교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지. 사시나무와 구름과 성운과 더불어 우리 모두 안에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어. 무엇으로부터의 발전이지? 무엇을 향한 발전이지? 끝없는 발전과 투쟁...? 그래, 어떤 방향이나 무한과의 투쟁이 존재할 수도 있어! 그리고 난 그 길을 쥐어짰는데도 삶의 의미가, 나의 충동과 갈망의 의미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놀랐지. 하지만 내 충동의 의미가 내 안에 너무나 뚜렷했기에, 난 언제나 그 의미에 따라 살고 있었어. 그래서 난 농부가 그것을, 하느님과 영혼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했을 때 깜짝 놀라고 기뻐했던 거야. 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어. 다만 내가 늘 알던 것을 인식했을 뿐이야. 난 삶이 내게 과거뿐 아니라 지금도 주고 있는 그 힘을 깨달았어. 허위에서 해방된 거야. 주인을 인식한 거야.
그는 그 어느 것(자살 시도)도 하지 않고 계속 생을 유지하면서 생각하고 느꼈다. 심지어 바로 그런 순간에도 그는 결혼을 하여 많은 기쁨을 맛보았고, 심지어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때조차 행복을 느꼈다. 그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가 모범적으로 살긴 했지만 올바르게 사색하지 않았음을 뜻했다.
난 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 왔어. 하지만 사색은 해답을 주지 못했지. 그 사색은 질문과 아무런 공통점을 갖지 않았어. 내게 해답을 준 것은 삶 그 자체였고, 해답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에 대한 나의 깨달음 속에 있었어. 그런데 그 깨달음은 내가 그 무엇으로도 획득할 수 없는 것이었지. 하지만 그것은 나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었어. 그것이 내게 주어진 것은 내가 그 어디에서도 그것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야. 난 그것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내가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 과연 이성 때문인가? 난 어린 시절에 그렇게 들었어. 그리고 난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믿었지. 왜냐하면 사람들이 내게 나의 정신 속에 무엇이 있는지 말해 주었기 때문이야. 그런데 누가 그것을 발견한 거지? 이성은 아니야. 이성은 생존 경쟁과 나의 욕망의 충족을 방해하는 인간들이 교살하라고 요구하는 법칙을 발견했지. 그것이 이성의 결론이야. 이성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결론에 이를 수 없어. 그것인 비이성적이니까. ... 이성의 오만일 뿐 아니라 이성의 우둔함이지. 무엇보다 속임수, 그래 바로 이성의 속임수야. 다름 아닌 이성의 사기이지.
우리도 그와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나 역시 이성으로 자연력의 중요성과 인생의 의미를 찾는답시고 똑같은 짓을 했던 게 아닐까? 철학적 이론들은 인간에게 부자연스럽고 기이한 사유 방법을 통해 인간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간을 이끈다 하면서, 사실은 아이들과 똑같은 짓을 했던 게 아닐까? 각 철학자들의 이론 발전을 보면 그들이 농부 표도르만큼이나 분명히, 아니 표도르보다 더 분명할 것도 없이 이미 삶의 중요한 의미를 알고 있으면서, 그저 미심쩍은 사유 방식을 거쳐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느냐 말이야?
우리는 그저 파괴만 할 뿐이야. 왜냐하면 우리는 정신적인 포만감에 젖어 있으니까. 아이들과 똑같아.
하지만 교회가 고백하는 것을 모두 믿을 수 있을까?
문제는 그것입니다. 정부가 시민의 의지를 실행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는 사회가 자신의 의지를 천명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읽은 게 뭔가?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과연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자를 위해 전쟁을 해야 할까?
리뷰
여러 시간에 걸쳐 여러 번 읽고 싶게 하는 책이다. 삶에 대한 많은 생각들을 할 수 있는 책이다. 다시 읽으면 읽을수록 그 깊이가 다를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그냥 읽어도 좋지만, 당시 러시아 사회나 역사에 대해 알고 읽는다면 더 쉽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이후 영어와 독일어 번역본으로 재독하며 이 작품으로 언어도 공부할 생각이다.
시중에 나온 대부분의 번역본을 비교해본 후 민음사 번역본을 구매해 읽었다. 민음사 번역본 추천드린다.
대부분 불륜 이야기로 알던데, 안나-브론스키의 관계보다는 각 인물의 심리를 들여다보고, 레빈이 삶에 대해 사유하는 그 과정에 집중해서 읽으면 더욱 풍부하게 읽을 수 있다.
러시아 소설 입문 이후 도스토옙스키로 넘어가기 전 읽으면 좋은 소설인 것 같다.
톨스토이라는 작가의 특징일 수도 있겠는데, 글을 간단명료하게 잘 쓴다. 같은 시대 작가인 도스토옙스키에 비하면 훨씬 읽기 쉽게 잘 쓰여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작가는 도스토옙스키이지만, 더 잘 읽히는데 인생에 대해 잘 논한 작품은 톨스토이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 문학 초심자가 두 작가의 작품 중 고민하고 있다면 톨스토이 작품으로 먼저 시작할 것을 추천하고 싶다.
각각의 인물로 전부 들어가 그 심리를 묘사한다는 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심지어 강아지의 관점도 나온다.
안나의 이야기로 재미를 얻고, 레빈의 이야기에서 인생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재미와 가르침을 동시에 얻을 수 있어 좋은 작품
재미있는 벽돌책을 찾는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하지만 너무 길기 때문에 다른 책과 병렬독서할 것을 추천한다.
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
📚 이 책을 읽게 된 계기
서점에 가면 뒷표지도 안 봤는데(줄거리 확인도 안 했다는 이야기이다) '무의식적으로' 끌리는 책들이 간혹 있다. 그런 책들 중 하나가 이 책이었다. 서점에 갈 때마다 이 책이 그렇게 눈에 띄었음에도 몇 번을 '애써' 무시했다. 그렇게 3-4번 정도 무시했을 무렵 서점에 갔는데 역시 눈에 아른거리더라. '아, 이 정도면 인연이다. 무조건 읽어야 한다'라는 마음이 생겼고, 그래서 구매하게 되었다.
이건 아주 내적 동기이고,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엔 다른 계기도 있었다. 책 관련 예능에서 배우 문가영이 좋아했던 책들을 소개하는데 나랑 아주 똑같은 취향을 갖고 있는 것이다. 단테 신곡, 논어 등.. 교보문고를 갔는데, 문가영 추천 도서로 평대에 올라있던 책이 이 책이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라는 홍보 문구를 보고 내가 당시 깊이 생각하던 주제와 부합하다고 생각되어 구매 후 읽게 되었다.
등장인물 / 줄거리 요약
래리 대럴: 1차대전 참전 후 고향으로 돌아온 후 트라우마 때문에 고통을 겪는 인물. 전쟁 중 친구의 죽음을 보며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백수로 살다가 파리로 건너가 깊은 공부를 해보지만, 파리에서 읽은 책과 공부했던 학문에서 그 답을 찾지 못해 폴란드와 인도 등을 다니며 다양한 경험 속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책 전반에서 사회 속에 녹아들기보다 세속적인 사회와는 약간 거리가 먼 곳들에서 탐구를 이어왔으나, 결국에는 세속적인 사회로 돌아가겠다는 선택을 한다.
이사벨: 래리의 전 약혼녀. 래리가 파리에서 공부를 마치고 결혼하기를 바랐으나, 래리가 추구하는 인생(물질적 안정이 우선이 아닌)과 자신이 추구하는 인생(물질적인 안정)이 상반되는 것을 깨닫고 돈이 많았던 '그레이'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결혼 후에도 래리를 잊지 못했나, 소피와 래리가 결혼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며 대놓고 화내는 장면이 나온다. 후반부에 몸이랑 이사벨의 대화 내용을 보면, 소피의 죽음에 이사벨의 영향이 없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소피: 래리의 약혼녀. 술과 약에 찌들어 사는 여자.
그레이: 이사벨의 남편. 부자였다가 대공황 이후 몰락한다.
엘리엇: 이사벨의 사촌. 세속적인 성공과 사회적 지위에 집착하며 공허한 인생을 산다.
서머싯 몸(서술자)
1장
죽음은 모든 것을 끝내며 따라서 포괄적인 결론이다.
고상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해피엔딩이라고 부르는 것을 비웃어야 한다고 경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결혼 역시 꽤 괜찮은 마무리 방식이지만, ... 결혼으로써 이제 필요한 이야기는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정상적인 본능이다.
마침내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면 그들은 생물학적 임무를 완수한 셈이고 이제 관심은 그다음 세대로 넘어간다.
본래 사람은 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더군다나 다른 나라 사람을 제대로 알기는 더더욱 힘들다.
사람이란 오로지 그 사람 자체가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태어난 지역, 처음으로 걷는 방법을 배운 아파트나 농가, 어릴 적 하던 놀이, 자연스럽게 들으며 자란 민간 속설들, 먹는 음식, 공부한 학교, 좋아하는 스포츠, 읽은 시들, 믿는 신 등이 그 사람을 만든다. 이러한 모든 요소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규정한다. 이것들은 그저 남에게 전해 들어서는 알 수 없고 직접 경험해야만 알 수 있다.
엘리엇에 대한 서술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후원해준 남자(엘리엇)가 큰 성공을 거뒀다는 사실이 기뻤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도 아직 형식적인 관계만 유지하는 사람들과 그가 매우 친밀하게 지낸다는 것이 조금 신경에 거슬렸다.
그들의 화려한 이름이 그로 하여금 그들의 결점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렸다.
(사교 모임 속에서 승리감을 느끼는 엘리엇에 대해) 그 모든 것 뒤에는 모험과 영웅 같은 것에 대한 열렬한 동경이 자리하고 있어서, 그 때문에 그가 호리호리한 프랑스인 공작에게서는 루이 9세의 지휘 아래 성지 탈환을 떠난 십자군의 모습을, 여우 사냥을 즐기는 거친 영국인 백작에게서는 헨리 8세가 황금 천 들판으로 갈 때 왕을 수행했던 옛 조상의 모습을 보았던 것 같다.
엘리엇은 광활하고 화려한 과거의 어느 순간을 살고 있는 기분을 느꼈다.
(래리와 이사벨에 대해) 부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측은한 느낌이 들었다.
래리와 몸의 대화
몸: 이걸 왜 읽고 있나? - 래리: 모르는 게 아직 많아서요. - 몸: 자넨 아직 젊잖아.
몸: (대학에 입학할 것을 권하며) 경험 많은 선생님들의 지도를 받으면 더 빨리 많은 걸 깨닫게 되지. 이끌어 줄 누군가가 없으면 막다른 골목에 접어들어 시간을 허비하게 되는 법일세.
래리: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 봐야 제 목표를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요?
몸: 자네의 목표는 뭔가? - 래리: 그게 문젭니다. 아직 목표를 모르겠어요.
래리에 대한 서술: 어렸을 때부터 항상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온 나로서는 몹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 나는 순간 직감이랄까, 이 청년의 내면에서 혼란스러운 갈등이 요동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 혼란과 불안감에 사로잡혀서 어딘지도 모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이 래리에게 왜 일자리 제안을 승낙하지 않았는지를 물었을 때 래리의 답):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요.
몸: 아무것도 잘하는 게 없는 사람들은 흔히 작가가 되기도 한다네. - 래리: 저는 그런 재능이 없습니다.
몸: 그럼 뭘 하고 싶은가? 래리: 그냥 빈둥거리고 싶습니다.
말을 물가까지 끌고 갈 수는 있지만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는 거야.
이사벨: 선생님,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할 사람이 없어요. 엄마는 엄마 입장에서만 보려고 하고 ... - 몸: 그게 당연한 거 아닐까?
래리와 이사벨의 대화
래리: 죽은 사람은, 정말로 죽은 사람처럼 보여.
래리: 혼자서 하늘을 날다 보면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지. 이상한 생각들도 들고 ... 그냥 막연하고, 앞뒤도 안 맞고, 혼란스러운, 그런 생각들.
래리: 뭔가 확실한 결정을 내릴 때까지는 마음의 평온을 얻지 못할 것 같아 ... 말로 표현하기가 참 힘들어. 표현하려고 하면 혼란스럽기만 하고, 어떤 땐 이런 생각이 들어. '이런 것 저런 것을 고민하는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내가 거만하고 몹쓸 인간이라서 그런 걸지도 몰라. 나도 남들 가는 길을 가면서, 그럭저럭 세상사에 순응하면서 사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 말이야. 하지만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쌩쌩하던 녀석이 죽은 모습으로 누워 있던 게 떠올라. 그러면 모든 게 얼마나 잔인하고, 얼마나 무의미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인가, 산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삶이란 눈 먼 운명의 신이 만들어 내는 비극적인 실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몸과 이사벨의 대화
이사벨: (래리를 기다린다는 본인의 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탓할 수만은 없어요. 물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밉긴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들거든요.
몸: 필경 래리도 자기 자신을 잘 모르고 있을 테니까. 목표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면, 그건 래리 자신도 확실히 모르기 때문일 거야 ...그가 뭔가를 찾고 있는데 그게 뭔지 자신도 모르는 게 아닐까? ... 그것(전쟁 중에 겪은 사건 등을 이름) 때문에 생겨난 불안감이 그를 가만 놔두지 않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어떤 미지의 구름 속에 숨겨진 이상을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이사벨: 무언가가 래리를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몸: 그의 영혼을 말이지? 래리는 어쩌면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몰라.
이사벨: (명랑했던 래리가 변한 것에 대하여)도대체 뭐가 그를 변하게 만들었을까요?
몸: 때로 인간은 아주 작은 무언가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눈앞의 사건과는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방향으로 생각이나 기분이 흐르기도 하지 ...
만성절(망자의 날)에 묘지 미사 때 몸이 느꼈던 것에 대한 진술: 그 작은 십자가들(묘비) 아래 누워 있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우리보다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 나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어.
전투가 끝난 뒤 프랑스 병사들의 시신이 쌓여있는 모습을 보고 몸이 느꼈던 것에 대한 진술: 마치 극다닝 망한 후라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져서 먼지 가득한 구석에 쌓여 있는 꼭두각시 인형들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거야. 래리가 너한테 했다는 그 말 있지, 죽은 사람은 정말로 죽은 사람처럼 보인다는... 그때 나도 그런 느낌이었어.
2장
엘리엇에 대한 묘사: 엘리엇은 상냥한 표졍을 지으면서 속으로는 사교적인 가치가 전혀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 (가십거리)가 재밌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이사벨이 래리에게 느끼는 마음: 래리와 있으면 그 누구와 있을 때보다도 편하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하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에 막연한 불안감도 있었다.
이사벨과 래리의 대화
(파리에 와서 인문학을 공부했다는 래리의 이야기에 대한 이사벨의 반응): 그런 것들을 배워서 뭐하려고 그래?
래리: 지식을 얻는 거지.
래리: 어쨌든 지금은 돌아갈 수 없어. 이제 막 뭔가 조금식 보이려고 하니까.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정신세계가 나를 부르고 있어. 난 그 세계를 여행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해.
이사벨: 거기서 뭘 찾고 싶은데?
래리: 내 의문에 대한 대답들.(신의 존재 유무,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는가, 내게 불멸의 영혼이 있는가, 현생에서 끝인가...)
이사벨: 하지만 래리, 그런 질문들은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이 물어 온 것들이잖아. 만일 해답이 있다면 벌써 밝혀졌을 거야 ... 2학년 쯤에나 한창 몰두하는 것들이잖아. 대개 사람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그런 건 잊어버린다구. 먹고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하니까 ... (그 질문에 대한 답을 10년이 걸리더라도 찾아내겠다는 래리의 말에) ... 그럼 그다음엔 어쩔 건데? 그런 것들을 알아낸 다음엔?
래리: 내가 해답들을 얻는다면, 그걸로 무엇을 할지도 알 수 있을 만큼 지혜로워지겠지.
이사벨: (미국의 전망에 대해 밝게 이야기하며)아, 물론 당신도 나름대로 뭔가 열심히 하고 있겠지만, 결국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모습이 아닐가? 일종의 고된 나태함에 불과한 게 아닐까?
이사벨이 이야기하는 본인의 인생관: 래리, 난 제대로 살고 싶어.(물질적으로 풍족한 삶)
이사벨: 대체 무얼 위해서? 해결할 수 없다고 당신 스스로도 말한,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차직 위해서/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사람은 일을 해야 해. 그게 사람이 태어난 이유야. 그래야 사회에도 기여할 수 있어.
래리: 내가 제안하는 삶(물질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지만, 인생에 대해 탐구할 수 있는 인생)이 당신이 생가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풍성한지 설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신적 세계를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즐겁고, 얼마나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는지 당신에게 알려줄 수 있다면... 그건 정말 끝없는 즐거움이고, 말로 형언하기 힘든 행복이야.
이사벨: 하지만 래리, 그거 알아? 당신은 나한테 맞지도 않는 삶을 요구하고 있어. 내가 관심도 없고, 또 관심을 갖고 싶지도 않은 삶 말이야 ... 지금 시간이 있을 때 삶을 즐기고 싶어.(물질적인 풍요를 원한다는 맥락). 당신히 말하는 삶은 시시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야. 제발 부탁이니, 당신 자신을 위해서 포기해. 래리, 당신은 남자니까 남자다운 일을 하란 말이야.
래리: (미국으로 돌아가자는 이사벨의 말에) 안 돼, 그럴 수 없어, 이사벨. 그건 내게 죽음과도 같아. 네 영혼에 대한 배신이야.
래리와의 파혼 후 이사벨과 몸의 대화
몸: 래리가 아무것도 안 할 거라고 말한 것 기억하지? 그가 이사벨하테 한 말이 사실이라면, 그 아무것도 안 한다는 말은 사실 대단히 치열한 공부를 뜻하는 것 같아.
이사벨: 뭔가 생산적인 일에다가 그만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꽤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몸: 세상엔 이상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 범죄자가 그만한 노력과 영리함과 자원과 인내심을 다른 정직한 일에 쏟는다면 남부럽지 않은 위치에 올라 꽤 잘살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들은 태어나길 그런 사람으로 태어난 거야 ...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열망에 너무 강하게 사로잡혀서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어쩌질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야 ... 그들은 어떻게든 그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지. 그 열망을 충족시키려면 다른 모든 걸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거고.
이사벨: 래리가 죽은 옛날 언어들을 배워서 뭐하려고 그럴까요?
몸: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지식 그 자체를 갈망하기도 해. 그건 멸시당해야 하는 욕망은 아니야.
이사벨: 하지만 아무 데도 쓸 곳이 없는 지식을 얻어서 뭐해요?
몸: 꼭 그런 건 아니야. 안다는 것 자체에서 만족을 느끼기도 하니까 ... 그리고 그건 뭔가 더 심오한 것으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단계일 수도 있고
이사벨: 그가 지식을 얻고 싶어 했다면 왜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복학하지 않았을까요/ 넬슨 박사님도 우리 엄마도 그렇게 하라고 충고했는데.
몸: 내가 어렴풋이 느끼기엔, 래리는 자기가 뭘 추구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어. 하지만 대학에서는 그걸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배움의 길에는 무리와 함께 다니는 늑대도 있지만, 혼자 외로이 걷는 늑대도 있는 법이야. 래리는 스스로 혼자만의 길을 가는 게 맞는 타입인 것 같아.
이사벨: 래리가 옆에 없을 대는 괜찮은데, 함께 있으면 제 마음이 약해져요 ... 견디기 힘들 만큼 고통스럽진 않지만 계속 느껴지고 신경 쓰이는, 그런 거요.
이사벨: 상식이라는 게 그렇게 큰 공감을 얻을 만한 멋질 건 아니잖아요?
몸: 남들이 안 가는 길을 가면 성공 가능성은 반반이야. 부름을 받는 사람이야 많지만 선택받는 자는 아주 적지.
이사벨: (파혼한 것에 대해)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할까요?
몸: 래리를 죽도록 사랑해?
이사벨: 잘 모르겠어요. 그를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 그래요. 그러면서도 그를 애타게 바라는 마음은 변함없고요.
몸: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이런저런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사람들은 지독하게 괴로워하면서 도저히 극복하지 못할 것처럼 생각해. 하지만 바다가 얼마나 유용한지 알면 놀라게 될 걸. 사랑은 항해에 서투르기 때문에 바다에 나서면 약해지지 ... 배를 타기 전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만 같던 아픔도 실은 얼마나 보잘것 없는 것인지 깨닫게 될 거야.
3장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면 갖가지 이유를 만들어 내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킨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결혼이 불행한 결말로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엘리엇에 대한 묘사: 폴 바턴이 들어가려는 사교계는 엘리엇이 끈질긴 인내와 노력으로 뚫고 들어갔던 그 사교계가 아니었다 ... 폴 바턴은, 엘리엇이 굳은 결심으로 수년 동안 노력하여 성취했던 것들을 단 몇 주일 만에 이뤄 냈다.
엘리엇이 과거에 했던 말과 달라진 (작품 속의) 현재에 대한 말: 훌륭한 미국인이 죽으면 가게 된다는, 그 파리는 결코 아니었다.
엘리엇의 생각이 바뀌었음을 나타내는 대목들
번잡하고 속된 세상사에 너무 지쳐서 말입니다. 저도 이제 자연의 아름다움을 좀 즐기며 살아야 할 나이가 되지 않았습니까.
엘리엇은 언제나 자연은 사교계 생활의 방해물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며...
유혹만큼 뿌리치기 어려운 것이 없는 법이라고 말했다.
엘리엇이 교외 지역에 온 이후) 그때부터 엘리엇 생에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가 시작되었다.
엘리엇을 보면서 무엇보다도 감탄한 점은, 그가 신분 높은 인사들을 대할 때 우아함과 예의를 한껏 갖추면서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난다고 가르치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독립적이고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엘리엇의 편지 중: 체념할 것은 체념하고 용기 있는 태도로 불가피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품위 있는 집안의 자손일수록 그에 어울리는 책임과 도리를 다해야 하니까요.
4장
이사벨: (대공황 이후 가난해진 상태에서) 지금 제 수입은, 래리가 청혼했을 때 갖고 있던 수입과 비슷해요. 지금은 아이 둘까지 키우는걸요.
정말 모든 게 무너졌을 때, 더 이상 살아갈 의미도 없다고 느껴졌어요. 정말이지, 미래고 뭐고 암담하기만 했어요. 한 2주 동안은 처참한 기분에 빠져 있었죠. 모든 걸 잃어버리고, 더 이상 낙도 없을 것만 같고, 좋아하던 모든 걸 잃어버리고, 더 이상 사는 낙도 없을 것만 같고, 좋아하던 모든 것들과 헤어져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2주쯤 지나고 나니 결국 이렇게 생각하게 되더군요. '그래, 다 잊어버리자. 과거에 대한 미련 같은 것. 다시는 떠올리지 말자.'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했어요. 지금도 미련은 없어요. 가졌을 때 충분히 즐겼고, 이젠 없으니 그뿐이고, 그렇게 생각해요.
몸과 이사벨의 대화
몸: 가끔 래리를 보면 그럴듯한 연극에서 자신의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 훌륭한 배우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사벨: 갑자기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 연기처럼 손아귀를 빠져나가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이상하게 변했을까요?
몸: 우리가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진부하고 흔한 무언가가 아닐가?
이사벨: (그레이에 대한 이야기) 그이를 진짜 사랑했다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사랑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구요. 마음속 깊이 래리를 갈망했지만, 눈앞에 안 보이니까 그럭저럭 버틸 수 있더라구요. 선생님이 그러셨죠? 드넓은 바다가 가로놓여 있으면 사랑의 고통도 어느 정도는 누그러든다고. 그땐 참 냉소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맞는 얘긴 것 같아요.
이사벨: (래리를 보는 게 고통이면 안 보는 게 현명하지 않겠냐는 몸의 질문에) 하지만 그건 천국과도 같은 고통인걸요.
이사벨: 저는 인간이고 아이들도 하나의 인간으로 대한다구요. 애들이 인생의 전부인양 애지중지하면 애들 버릇만 나빠져요.
욕망을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걸 충족시키는 거잖아요.
사랑에 빠진 용감한 연인이여. 당신은 결코 입 맞출 수 없으리라.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기만 할 뿐 - 존 키츠
성적인 열정 없이 사랑이 존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지. 간혹 열정이 죽은 후에도 사랑이 지속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사랑아 아닌 다른 무엇, 일테면 애정이나 온정, 혹은 취향이나 관심사의 공유 아니면 습관 등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거야
사랑이 열정이 아니라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다른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거야. 그리고 열정은 서로 만족할 때 커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장애가 있을 때 더욱 커지는 법이지
래리에 대한 네 사랑도, 너에 대한 래리의 사랑도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의 사랑이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만큼이나 자연스럽고 단순한 거야
너희 둘 사이엔 열정이 개입되지 않았어 ... 열정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 열정은 파괴적인 거야 ... 열정은 무언가를 파괴하지 않으면 소멸해 버려 ... 껌 한 쪽만도 못한 상대에게 영혼을 전부 쏟아부었음을 깨닫는 비참한 순간이 찾아오는 거지.
5장
정숙해 보이는 여자일수록 묘하게도 외설스러운 것들을 많이 알고 있는 법이다.
남편과 아기가 죽었을 때 소피는 세상이 끝난 것처럼 느껴졌을 거야. 그래서 자신이 어떻게 될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술과 난잡한 성교라는 끔찍한 타락으로 스스로를 내몬 거지. 자신을 그렇게 잔인하게 대한 삶에 복수하기 위해서 말이야 ... 천국 같은 생활을 하다가 그것을 잃게 되니까 보통 사람들이 사는 보통 세상을 견디지 못하고 좌절해서 지옥으로 곤두박질친 거야.
선에서 갑자기 악이 툭 튀어나올 수는 없죠. 악은 예전부터 항상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걸 잘 막아 두고 있다가 차 사고로 그 방어막이 깨지면서 본래의 모습이 나온 것뿐이에요.
나는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노라. 싸울 만한 상대가 없었기에. 자연을 사랑했고 그 다음으로 예술을 사랑했노라. 삶의 불에 두 손을 녹였노라. 불길이 꺼지려 하니, 나는 이제 떠날 준비가 되었도다. - 랜더(영국 작가)
래리: (소피가 문란한 사람이라는 걸 얘기하는 이사벨에게) 그렇다고 해서 나쁜 여자라고 할 순 없지. 존경받는 사람들 중에서도 술을 좋아하고 아무하고나 자는 사람도 많아. 물론 좋은 습관이라고 할 수는 없지. 손톱을 물어뜯는 습관처럼 말이야. 하지만 그것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군. 난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치는 사람, 혹은 불친절한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하거든.
몸: 네가 래리를 포기한 건 다이아몬드와 모피 코트 때문이었잖아.
그는 지금 인간의 가슴을 붙잡는 가장 강력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결국 예수는 지고 말았어. 마귀는 옆구리가 아프도록 웃어 댔지. 사악한 인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죄를 범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야.
난 단지 자기 확신이 얼마나 강력한 열정이 될 수 있는지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야. 정욕도, 굶주림도 그 옆에서는 아주 하찮은 영역이 되어 버리지. 자기 확신에 사로잡히면 그것으로 자신의 성격을 완전히 단정 짓게 되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어. 그 확신의 대상은 중요하지 않아 ... (자기 확신은) 그 어떤 술보다도 중독성이 강하고, 그 어떤 사랑보다도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또 그 어떤 악덕보다도 강력하고 매혹적이야. 사람은 자신을 희생시키는 순간 하나님보다 훨씬 더 위대한 존재가 되지. 왜냐면 전지전능한 하나님도 자신을 희생시키진 못했으니까.
순수한 아이로만 알고 있던 여자가 타락한 것을 보고 그 여자의 영혼을 구하고픈 욕구에 사로잡힌 거야 ... 래리에겐 그런 냉혹함이 없지. 성자라고 해도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하는 그런 냉혹함 말이야.
기독교가 일으킨 잔인한 전쟁들과 박해, 기도교도들이 기독교도들에게 가한 고문, 몰인정, 위선, 편협 등을 보면서 마귀는 흡족한 얼굴로 손익을 따져 보고 있지 않을까? 인류에게 죄의식이라는 쓰디쓴 짐이 지워졌다는 사실, 그 죄의식 때문에 별이 빛나는 아름다운 밤이 캄캄해지고 잠시 스쳐가는 이 세상의 쾌락들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마귀는 킬킬거리면서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다. '아무리 마귀라도 인정할 건 인정해 줘야지.'
래리가 그 오랜 시간 동아 무엇을 찾아다녔는지 - 철학이나 종교 그리고 머리와 가슴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인생의 규칙 같은 것을 찾지 않았을까 하는데.
인생을 최대한 쓸모 있게 사는 법, 그것보다 더 실용적인 게 있을까?
소피: 막상 결혼 날짜가 다가오니까 예수 그리스도 같은 그 사람(래리)한테 막달라 마리아가 되어 줄 수 없을 것 같더라고요.
어쨌든 사는 게 엿 같잖아요. 그걸 잠시나마 잊게 해 주는 무언가가 있다면, 당연히 누려야죠.
모든 종교는 그 지도자들이 사람들을 멋대로 조종하기 위해서 꾸며 낸 음모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죠.
아무리 종교를 비웃더라도 임종이 다가오면 신앙과 화해를 꾀한다. 신앙은 그들의 피와 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신앙이 절박하기에, 얼마나 불같은 욕망이기에 삶의 기쁨과 젊은 나이에 즐길 수 있는 쾌락 혹은 관능의 만족 따위를 모두 포기하고 신에게 헌신하는 길을 택했을까?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훌륭한 하인이었으니, 하나님도 그런 잘못된 생각쯤은 너그럽게 봐주실 거야.
엘리엇 템플턴 씨는 하느님과의 선약 때문에 노베말리 공작 부인의 친절한 초대에 응할 수 없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6장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대목)
이 장을 건너뛰어도 줄거리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대화가 없었더라면 나는 이런 책을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란 점을 분명히 밝혀 두겠다.
걱정이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더군요. 가끔은 그것이 가장 끈질긴 인간의 고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어떤 깊은 동물적 본능, 즉 인간이 삶에 대한 전율을 처음 느낀 원시 생명체로부터 물려받은 동물적 본능을 기인한 것은 아닐까?
유럽에서 수많은 책을 읽고 많은 것을 봤는데도 제가 찾는 것에 조금도 가까이 가지 못한 것 같았거든요.
정신적으로 수렁에 빠진 기분이 들거나 한동안 추구하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나면 그런 일을 하는 게 도움이 되더군요.
신부와 래리의 대화
신부: 이런 책에서 찾고자 하는 게 뭡니까?
래리: 그걸 알았다면 지금쯤은 적어도 그것을 찾고 있겠죠.
(중략)
신부: 그럼 4년 동안 책을 읽었단 말입니까? 그래서 무엇을 얻었습니까?
래리: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래리와 몸의 대화
래리: 죽은 사람을 제 눈으로 직접 보게 됐어요. 수치심이 밀려들더군요.
몸: 수치심?
래리: 그렇습니다. 수치심.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혈기왕성하고 선량하던 사람이 애당초 살아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엉망진창의 고깃덩어리로 변해 버린 겁니다.
(몸이 의대 시절에 시신을 보며 했던 생각): 그들의 모습이 너무 하찮게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래리: (죽음을 목격한 후) 그날 밤, 저는 잠을 이룰 수 없었어요. 저도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워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보다는 화가 나더군요. 제가 견딜 수 없었던 건 부당함이었어요 ... 사람들이 원하는 그런 종류의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었어요. 너무 하찮게 느껴졌꺼든요 ... 끊임없이 자문했죠. 삶의 목적이 무엇일까? 내가 살아 돌아온 건 단지 운이 좋아서였잖아요. 그래서 제 삶을 십분 활용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죠. 그 전까지는 저는 신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는데, 그때부터 신을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죠 ... 배움을 얻기 위해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죠.
(여러 작가의 책을 읽었으나) 그런데도 아무런 답이 보이지 않는 겁니다.
수도원 생활과 하나님에 대한 래리의 이야기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저한테 꼭 맞는 생활이었거든요.
그토록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그토록 활동적으로 사고를 하는데도 계속 휴식을 취하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지만 그건 그리 가치 있는 목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사들이 암송하는 주기도문을 듣고 있으면 저들은 어떻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꾸준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죠.
아버지가 음식을 준다고 해서 고마워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죠. 오히려 낳아 놓고 제대로 못 먹이거나 안 먹이면 우린 그런 사람을 비난합니다. 전능하신 창조주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물질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제공할 준비가 안 됐다면 그들을 창조하지 말았어야죠.
하느님이 대놓고 칭송받길 원한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었죠. (사람들도 아부하는 사람을 싫어하는데) 그런데 하느님이라고, 집요하게 아첨해서 교묘하게 구원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을 좋아할까요? 하나님 역시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가장 유쾌한 숭배 방식으로 여겨야 하는 것 아닙니까?
죄악에 대한 선입견과 타협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죠.
나쁜 버릇은 주로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유전적인 요소나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환경에서 오는 거잖아요. 그들의 범죄가 사회의 책임이 아니라고, 그들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없는 곳이 지옥이라고 생각했던 과거 이야기를 한 후) 하지만 그게 지옥이라고 불릴 정도로 견딜 수 없이 지독한 수준이라면, 선량하신 하느님이 어떻게 그런 벌을 내릴 수 있는 겁니까?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로 창조했다면 그건 하느님이 의도했기 때문이겠죠.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대체 악은 왜 창조한 겁니까?
수도사들은 자기 안에 있는 사악함을 무너뜨리고 유혹에 저항하며, 고통과 슬픔과 불행을 하나님이 정화를 위해 내리는 시련으로 받아들이면, 결국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될 수도 있다고 했죠. 그건 마치 심부름을 보내면서 험난하게 만들기 위해 복잡한 미로르 만들고 해자를 두르고 마지막으로는 벽을 만드는 것과 똑같은 것 아닙니까?
이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지만 악행을 발견하면 최선을 다해 바로잡는, 인간보다 훨씬더 선량하고 현명하고 위대한 신을 믿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죠.
(수도원)에 있던 착한 신부들은 이렇게 혼란스런 의문들에 대해 머리로든 가슴으로든 만족하 수 있는 답을 내놓지 못하더군요. 그곳은 제가 찾던 곳이 아니었던 겁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신은 신이 아닙니다. 어느 누가 무한한 존재를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대다수가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라는 보장은 없지.
하지만 영혼 뿐 아닐 육체도 그 사람의 일부 아닌가?
자신이 겪는 악이나 불행은 비교적 쉽게 견딜 수 있죠.
하지만 그렇다면 왜 신은 처음부터 고통이나 불행이 없는 세상을 창조하지 않은 거지?
결국 자신의 영혼에서 위안과 용기를 찾아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어떤 대상을 숭배하고자 하는 욕구가 잔인한 신들에 대한 기억의 잔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를 구원의 필수 조건인 것처럼 더벌리던 종교 창시자들에 대해 서글픈 마음을 갖고 있어요.
인식이라는 수단은 인간의 가장 귀한 능력, 즉 이성이니까요.
이 세상에서 느끼는 만족은 덧없는 것이며, 오직 무한한 존재만이 지속적인 행복을 줄 수 있다고 대답하더군요. 하지만 끝없이 존속한다고 해서 좋은 것이 더 좋아지지는 않으며 하얀 것이 더 하얘지지는 않죠.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요. 그러니 무언가에게 영원한 존속을 요구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겠죠. 하지만 그것이 존재할 때 그 안에서 기쁨을 취하지 않는 것은 훨씬 더어리석은 거예요.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순 없어요.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니까. 하지만 다른 강물에 들어가도 그것 역시 시원하고 상쾌한 건 틀림없어요.
세상 속에 살면서 이 세상의 만물을 사랑해야 할 것 같았어요.
(인생에 대한 질문) 애초에 해답이 없었을 수도 있고 제가 모자라서 끝내 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죠.
절대자가 이 세상에 그 자신을 현현했을 대 선과 악이 본질적인 상관관계를 갖고있지 않았을까 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도 오직 악과 결합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을 최대한 이용해라.
이후 래리와 몸의 대화
래리: 여기서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미국으로 돌아갈 겁니다.
몸: 뭐하러?
래리: 살러요.
몸: 어떻게?
래리: 인내를 갖고 평온하게, 자비롭게, 욕심 없이 그리고 금욕적으로.
몸: 금욕은 왜? 자넨 아직 젊잖아. 인간이 가진 가장 동물적인 본능을 억제하려는 게 과연 현명한 일일까?
래리: 성적 탐닉은 쾌락이긴 해도 욕구는 아니었습니다 ... 성적 금욕이 정신력을 크게 강화해 준다는 거죠.
몸: 내 생각엔 육체적인 요구와 정신적인 요구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게 지혜로운 일인 것 같은데.
래리: 인도인들이 생각하기에 행복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에 있는 겁니다. 그들은 (물질적인 길)이 결국 파멸로 향하는 길이라고 말하죠.
몸: 글머 미국이, 자네가 앞서 말한 미덕들을 실행하기에 적절한 곳이라고 생각하나?
래리: 오히려 돈을 갖고 있으면 전부 써 버리죠 ... 우리에게 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성공의 상징에 불과하죠 ... 저는 인간이 세울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이상이 자기완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몸: 고귀한 이상이지, 래리.
래리: 그렇다면 그것을 추구하려 노력하는 게 가치있는 일이 아닐까요?
래리: (몸이 이야기하는 현실의 벽에 대해) 시도는 할 수 있잖아요. 물레도,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도 한 사람이었어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작게나마 영향력을 갖고 있게 마련이죠 ... 한 인간이 고결하고 완벽해지려면 그런 성품의 영향력이 널리 퍼져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그사람에게 이끌리게 됩니다
래리: 물론 영향이라고 해봐야 ... 아주 미미할 겁니다. 하지만 하나의 물결은 또 다른 물결을 일으키고, 그것은 다음 물결로 이어지죠.
몸: 자네가 설계한 그런 삶을 살려면 금전적으로 자유로워야 할 텐데.
래리: 아뇨. 오히려 금전적인 자유는 제가 설계한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 겁니다.
래리: 저는 몸으로 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 (스피노자의 육체 노동 일화를 들며) 그런 일은 틀림없이 스피노자의 지적 활동에 도움이 됐을 겁니다. 고찰이라는 힘든 작업에서 잠시나마 주의를 돌릴 수 있었을테니까요.
몸: 자네, 돈의 가장 중요한 용도가 뭔지 잊은 모양이군. 그건 바로 낭비할 시간을 절약해 준다는 거지.
래리: 선생님에게는 돈이 자유를 의미하지만 저한테는 속박이 될 뿐이죠.
7장
이사벨이 소피가 죽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는 걸 암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룸(이 부분이 인상적이었음)
몸: 누군가를 정말 좋아하면 그 사람의 잘못을 비난하긴 해도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이 식지는 않거든.
래리는 자신의 바람대로 떠들썩하고 소란스러운 인간 집단에 흡수되었다. 이해관계의 상충으로 괴로워하고 세상의 혼란 속에서 방황하며, 선을 강렬히 소망하면서도 외부에 대해서는 독단적이고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매우 소심한 인간들, 친절하지만 까다롭고, 남을 잘 믿으면서도 의심이 강하며, 야비하면서도 너그러운 미국인들 속에 흡수되어 버렸다.
결국 내가 등장시킨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 원하는 바를 얻지 않았는가?
⭐ 리뷰
"나는 독자들에게 정해진 결론을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1장에 언급해뒀는데, 결말이 진짜 그렇게 끝난다. 그러니까, 열린 결말이란 말이다. 열린 결말을 좋아하지 않으면 추천하지 않는다.
이야기 흐름에 집중하기 보다, 각 인물들이 인생을 대하는 방식(살아가면서 하는 선택)에 집중해서 읽으면 좋을 것 같다.
1에서도 말했듯이 '이렇게 살아라~'라는 조언을 주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더 기억에 남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내용들이긴 하지만 작가 개인의 메시지도 아주 없지는 않은 듯하다. 너무 세속적으로 사는 삶을 지양하라는 메시지, 너무 일과 사회를 멀리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았나 싶다.
이 정도면 고전 중에서 나름 술술 읽히는 쪽에 속하지 않나 싶다. 고전을 찾는 사람 중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댈 수 있는 다양한 케이스를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봤으면 한다. 대놓고 답을 주지는 않지만, 다양한 케이스를 보며 내 답을 찾는 데에 나름 도움이 될 것이다.
리뷰보다는 생각해볼 만한 곳에 대한 이야기: 엘리엇이 폴 바턴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 대한 기타 묘사(203페이지)를 참고해보자. 나보다 못한 사람이 잘나가게 되면 그 속에서 나오는 감정이 있는 것 같다. 한때 자신보다 못났던 사람의 현재(잘된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기저에 있는 것 같다.
철학에 묻고자 하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한 철학(내지 종교)의 입장들이 굉장히 집약되어 있는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유신론과 무신론 / 기독교 - 고대 그리스 철학 - 인도(동양) 철학/ 이상주의자 - 현실주의자 / 돈이 자유를 주는 존재인가 - 속박을 주는 존재인가 / 실존 탐구의 필요성을 느끼는 자 - 그렇지 않은 자(세속적이거나 현실적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