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I converted from Protestant to Roman Catholicism?
원래 이에 대해 썼던 글이 있었지만, 업데이트 하고 싶은 내용이 있어 다시 올려본다. 일단 난 4대째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양가가 그런 건 아니고, 친가 쪽이. 외가 쪽은 제사만 지내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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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이야기하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개인사나 사회적인, 역사적인 문제 때문에 개종한 것도 맞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게 내 개종 고민의 시발점이었던 것은 맞지만 개종의 결정타는 아니었다. 실제로 내가 개종하기로 한 원인은 개신교, 특히 한국의 복음주의 개신교의 여러 부분에 동의하지 못해서 개종한 게 컸다. 이번 글에서는 내가 어떤 부분에 동의하지 못해서, 맞지 않아서 개종하게 되었는지 써보려고 한다.
1) 예배 방식
개신교 다니면서 매번 의문이었던 부분이 세 가지였다. '이렇게 시끄럽고 과도한 액션을 취해야 하는가', '말씀 봉독 조금에 저렇게 긴(혹은 필요없는 이야기들을 하며) 부연설명이 필요한가', '이런 행위를 굳이 일주일에 한 번, 그리고 한 시간 반 씩이나 해야 하는가'. 교파마다 다르긴 하지만 성공회나 루터회 같은 고교회가 아닌 이상, 보통의 개신교 예배는 찬양 + 대표기도 + 봉독 + 설교 + 통성기도 + 축도로 이어진다. 가끔 사도신경을 외우고 시작하는 교회들도 있지만, 내가 간 대형교회는 그것조차 하지 않았다.
찬양이 너무 길다. 찬양만 20~30분 정도 하는 것 같은데, 거룩한 느낌이나 진지한 느낌보단 콘서트 같았다. 그렇게 콘서트 같던 찬양이 끝나면 대표기도가 시작된다. 대표기도의 주제는 대부분 부흥 이야기나 '성령이 임해서 목사님이, 성도들이 ~하게 해주시고'와 같은 기도가 대부분이다. 괴로운 시간을 지나고 있는 어려운 이들에 대한 기도는 거의 하지 않는다. 이후 말씀 봉독은 많아봐야 10줄 내외다. 그리고 설교라는 이름으로 이것에 대한 주석이나 개인 썰풀기가 40분 정도 이어진다. 이런 방식이 구약(혹은 묵시록)-시편-신약 서간-복음서 봉독의 형식을 취하는 전례교회에 비해 이게 성경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지 솔직히 의문이다. 이후 부흥과 복음화(= 신자들 늘어나게 해달라~), 나라를 위한 기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나라가 되게 해달라~)를 놓고 10분 내외로 통성기도를 한다. "주여~~~~"하고 목사가 외치면 사람들이 손을 들고 감정에 취해서 소리치며 기도한다. 눈물을 흘리거나 방언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러면 전례교회는 어떻게 할까? 크게 보면 입당송 + 성호경 + 고백기도/말씀전례(구약-시편-신약 서간-복음서 + 강론 - 보편지향기도)/영성체(사도신경+봉헌+주님의기도+평화인사+성찬)/파견(강복 - 파견성가)로 진행된다. 조용하고 경건하게 진행되며 고양된 감정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절차 안에 그리스도인이라면 기억해야 하는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보편지향기도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때는 가난한 이를 위해, 난임 부부들을 위해, 자살의 유혹을 겪은 이들을 위해 등등 세계에 있는 다양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이렇게 전례(미사)에 참여해보고 나서야 내가 왜 개신교 예배가 불편하게 느껴졌는지 알게 되었다.
전례는 ‘감정의 발화’가 아니라 ‘신앙의 기억과 전통’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간단한 형식 안에 감정 고양만을 추구하는 것들이 들어있는 것보다 형식 안에 필요한 기도와 말씀들이 담겨있는 전례교회가 나는 옳다고 생각한다.
2) 꼬리 자르기
내가 굉장히 싫어했던 부분이다. 어느 교회나 신자가 잘못된 행동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꼭 나오는 이야기이다. '일부 교회의 만행으로 개신교 전체를 폄하하지 마세요', '노력하고 있는 목사님/산자들도 많아요', '쟤는 이단/사이비라 그래요', '우리 교회는 안 그래요'까지. 이 말들을 하나하나 분석해보기로 하자.
- 일부 교회의 만행으로 개신교 전체를 폄하하지 마세요. / 노력하고 있는 목사님과 신자들도 많아요.
중세의 천주교는 굉장히 타락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 중에도 바른 삶과 선행으로 산 사람들이 분명히 많았다.(누가 그렇게 살았는지 궁금하다면 16세기에 살았던 가톨릭 성인들의 삶을 알아보면 된다.) 하지만 이 성인들이 선행을 하고 좋은 삶을 살았다고 해서 가톨릭이 타락하지 않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일부 교황과 성직자들로 인해서 천주교 전체가 폄하당했다고 변호해주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제 저 문장에 있는 중세/천주교/성직자(성인)들을 빼고, 현대/개신교/목사라는 단어를 대입해보자. 그러면 지금 개신교에 딱 맞는 문장이 된다.
그리고 이 '일부'라는 말부터 굉장히 잘못됐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니케아 신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조건에 '하나되고 보편되며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고 되어 있다. 이 사람들을 일부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 교회와 저 사람들 모두 하나되지도 않고, 보편되지도 않다는 것을 스스로 천명하는 꼴이다. 일부라는 말을 뱉음으로써 '우리는 교회 조건 네 개중 두 개나 안 맞는 교회입니다'를 스스로 실토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문장이 왜 틀렸는지 보자. 특히 이 얘기를 할 때 방패로 내세우는 교회는 시골에 있는 작은 교회 목사님들인데, 평소에는 대형교회와 시설 좋고 사람 많은 교회로 우르르 몰려가 예배하면서 왜 본인들 불리할 때만 개척교회 목사들이나 신자들을 찾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단 몇몇의 선한 사례가 구조적 타락을 상쇄할 수는 없다. 이는 위 문장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 쟤는 이단/사이비라 그래요.
잘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이단/사이비이고 본인네 일이 아니라고 한다. 전광훈은 처음부터 자기 교단을 파서 목회를 했었나? 만민중앙교회는 처음부터 이단/사이비였나? 인분 먹이고 매 맞게 한 빛과진리교회는 예장합동인데, 예장합동도 이단/사이비라고 할 것인가? 조용기 목사는? 이런 방관과 꼬리자르기는 수많은 이단/사이비의 출현을 조장하는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사이비'라는 말의 정의를 다시 보자.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사이비란 '겉으로는 비슷하나 본질은 다른 것'을 뜻한다. 겉으로는 교회 같아 보이지만 교회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타락한 교단과 교회들한테 적용하면 딱 맞는 말이 아닌가.
- 우리 교회는 안 그래요.
들을 때마다 제일 답답한 말이 단연 이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람들은 한 교회만을 놓고 비판하는 게 아니다. 개별 교회를 묶는 교단과 많은 교회의 흐름, 신자들의 행동 흐름을 보고 비판하는 것이다. 위에도 말했지만 어느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해서 지금 교단과 교회들의 타락이 막아지지는 않는다.
가령 개한테 물려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 사람한테 개를 들이밀며 '우리 개는 안 물어요'라고 말하는 게 과연 옳은 언행일까? 그리고 '우리 개는 안 문다'라는 사실이 입질이 심한 수많은 개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덮을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3) 개신교에 대한 도덕적 잣대가 높다는 망상
이 질문에 답해보자.
- 천주교 신자들이 개신교는 이단이라면서 개신교회의 시설물 곳곳에 배뇨를 했다고 해보자. 이 사람이 욕을 먹는다면 그 이유는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아서일까, 아니면 타 시설물에 들어와 오줌을 싸는 비도덕적 행위를 해서일까?
- 스님들이 길거리에 나와 '부처열반 불신윤회'를 외쳤다고 해보자. 이 스님들은 당연히 욕을 먹을 것이다. 사람들이 이 스님을 욕하는 건 부처를 닮지 않아서일까, 종교를 강요해서일까?
- 무슬림들이 학살과 전쟁을 일으킨다. 사람들이 무슬림들을 욕한다면 무슬림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 그런 걸까, 학살과 폭력을 자행해서 그런 걸까?
어떠한 종교를 믿는 사람이 본인이 믿는 신을 잘 따르는지 아닌지, 도덕적으로 훌륭한지 아닌지에 대해서 사람들은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사람들이 종교인에게 바라는 건 오직 세 가지이다. 본인의 종교를 강요하지 않으며, 타 종교를 비하하지 않고, 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것. 현재의 개신교가 욕을 먹는 이유는 이 세 가지를 전부 어겨서이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고사하고 상종하기 싫게끔 몰상식적인 행동을 하는데 사람들이 고운 시선으로 봐주기를 바라온 것이라면 다음 성경 구절을 떠올려보기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루카 6, 31)
4) 교리는 중요하지 않다는 거짓말
종종 개신교 신자들에게 그런 말을 듣는다. "전례 교회(특히 천주교)는 너무 교리 중심이고 율법 중심이야. 개신교는 예수님의 사랑과 선행을 중시하지 교리를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더 성경적이야." 혹은 "교리? 그게 뭐가 중요해? 내가 예수님과 친밀하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난 이런 사람들에게 반대로 물어본다.
- 근데 왜 제삿날마다 싸워? 니들이 율법주의적라고 욕하는 천주교도 제사와 절이 허용되는데 왜 교리가 안 중요한 개신교는 절 안 해서 명절마다 분위기 흐리고 싸울까?
- 근데 왜 성인 공경, 성모 공경을 우상 숭배로 봐? 그냥 롤모델 존경하는 정도로 보면 되잖아?
- 교리 안 중요한데 왜 일요일날 예배 빠지는 건 용납을 못해?
- 누구보다 성경 읽기와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야. 근데 십일조는 안 내. 넌 이 사람을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해줄 수 있니?
- 왜 요한묵시록(요한계시록) 12장의 여인을 마리아로 해석하지 않고 교회라고만 해석해? 교부들은 마리아로 해석하는데?
- 회개하고 복음을 전하라고 해서 전도하는 거 아니야? 교리가 안 중요한데 무례하게라도 전도하는 이유가 뭐야?
누구보다 교리를 사랑하고 칼같이 지키려는 개신교가 자유로운 종교인 척 하는 걸 보면 웃기지도 않다. 이제 교리가 안 중요하다는 거짓말은 그만하자. 교리가 안 중요한 종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5) 발의되지도 않은 법을 반대하는 기이한 현상
작년 개신교계에선 1027 연합 예배라는 이름으로 입법되지도 않은 포괄적 차별금지법 반대 시위를 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도입되면 전도를 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LGBT 사람들이 늘어나 문란한 사회가 도래할 것이다."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민주당이 되면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킬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왜 그들의 주장이 틀렸는지 하나하나 뜯어서 설명하겠다.
- 소수자는 소수자일 뿐이며, 문란은 개인의 도덕성 차이일 뿐.
소수자는 소수자일 뿐이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든 말든, 성소수자의 수가 갑자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일은 없다. 성적 지향은 인류 집단 안에서 일정한 비율로 존재해온 정체성이다. 그리고 사회가 ‘문란해지느냐’는 성적 지향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도덕성, 성적 행동 방식, 사회적 규범의 문제다. 이성애자라고 해서 더 도덕적이거나 건전하다는 보장은 없으며, 동성애자라고 해서 인성이 나쁘거나 문란한 것도 아니다. 성병 감염 패턴 역시 ‘성적 지향’보다 위험한 성적 행동의 방식이 훨씬 더 큰 요인이다. 특정 집단의 성적 지향이 문제가 아니라, 콘돔 사용 여부, 성매매 여부, 다수 파트너 여부, 검사·치료 접근성 등의 요소가 감염률을 크게 좌우한다. 즉, ‘동성애 = 문란’이라는 도식은 사실과도 맞지 않고, 논리적으로도 성립하지 않는다. 이는 성적 지향 자체가 문란함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성적 행동이 이루어지는지가 감염 위험을 좌우한다는 연구들에서도 나타난다.
- 차별금지법이 도입되면 전도가 안 된다?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를 헌법에서 보장해주는 국가이다. 이 종교의 자유에는 신앙 생활의 자유도 포함되어 있으며, 신앙 생활의 자유 안에는 포교의 자유(전도의 자유)도 포함이 된다. 이 법이 종교의 자유를 위반하는, 그러니까 헌법을 위반하는 법이라면 상위법을 위반한 하위법인 동시에 위헌이다. 이러한 법은 생길 수도 없으며, 만일 생겼다고 해도 위헌으로 판정되어 헌법재판소 측에서 폐지를 요구할 것이다.
- 민주당이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킬 것이다/입법을 시도하고 있다
지금 친명계 내각의 인사들을 보자. 지금 국무총리가 된 김민석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며, 신앙적 근거에 따라 차별금지법을 반대했다. 친명계 의원 중 한 명인 이언주도 동일했다. 이언주는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적이 없다"라고 밝혔으며, 개인적으로도 개신교 신자로서 차별금지법 발의를 반대하고 있다. 민주당에서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법안"이라며 논의부터 미뤄뒀으니 더욱 걱정할 필요가 없다. 특히 지금 민주당 지도부인 박찬대와 정청래도 매우 독실하기로 유명한 안수집사인데 어디가 그렇게 걱정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6) 선택적인 정죄
개신교의 어떤 폐단에 대해 지적하면 상당수의 개신교인들이 "정죄하지 말고 기도해라"라고 말한다. 그게 아니면 "기도하는 방법 밖에 없지"라는 말로 묵인을 선택했다. 내가 본 개신교인들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쇄신하지?"를 논하지 않고, "이 불편한 비판을 어떻게 무마하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런 비판을 들을 때면 "어떻게 고쳐야 할까?"를 논의하려 하지 않고 늘 "우리 교회(목사님)은 안 그래", "거긴 이단/사이비야", "거긴 일부야. 다른 곳은 안 그래"라는 말로 비판을 흐리는 데만 급급했다. 자신들에 대한 비판은 정죄니까 하지 말라고 하면서 정작 본인들은 동성애자나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에 대해 죄인이니 적그리스도니 하며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을 동반해 정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사고가 가능하긴 한지 의문이 들었다.
동성애자에 대해서는 죄인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전광훈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동성애자를 축복한 목사는 즉시 출교를 해버리지만, 성범죄 목사의 출교 재판은 미룬다.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시위나 기도, 서명운동에는 열심히 참여하면서 위헌인 12.3 사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내가 제일 어이없었던 순간은 어느 대형교회 목사가 청년부 톡방에 올린 글을 읽은 때였다. "대통령을 비판하지 말고 나라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라"며 계엄에 대한 비판을 삼가라는 장문의 궤변을 는 말로 비판을 삼가라는 의도의 글을 썼다. 나는 이걸 쓴 목사도 그렇지만, 이 글에 어떤 분별력도 갖지 않고 수긍하는 청년들이 더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매번 부흥을 논하는 사람들이 신앙적인 사고는 고사하고 민주주의 아래 사는 국민으로서의 분별력도 없다면 그 사람들이 사제직, 왕직, 예언자직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뿐만이 아니다. 본인네 교파에서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사건이었던 모 대형교회 과로사 사건, 아프간 피랍사건, 수많은 성범죄 목사 등에서뿐만 아니라 청교도가 미국에서 일으킨 사건, 가톨릭이 화형을 폐지한 이후에도 쭉 화형을 지속해온 점 등에 대해서는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 반성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본인네 교파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면서 그저 약 500년 전 중세 천주교의 부패에서 벗어나 개혁을 시도했다는 것만 몇 세기 동안 훈장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개혁과 쇄신을 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를 향해 수많은 정죄를 쏟아내고 있다. 이래도 개신교가 진정한 개혁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
7) 성경에 대한 왜곡된 시각
- 성경의 정경화 작업으로 보는 오직 성경이 틀린 이유
교파마다 살짝씩 다르긴 하지만 개신교는 66권, 천주교 73권, 정교회 76권을 성경으로 인정한다. 일단 세 교파 모두 신약은 27권으로 동일하다. 가톨릭은 초대교회에서 쓰던 70인역 성경을 구약 성경으로 인정했고, 개신교는 유대교와 동일하게 히브리어 원본이 발견되지 않은 39권만을 인정했다. 정교회는 가톨릭에서 인정하지 않은 부분을 추가로 더 인정해 76권이 되었다. 이 정경화 과정에서 구약, 신약 모두 빠진 부분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 이 책을 넣고 빼고는 누가 결정했을까? 교회가 결정했다.
성경의 정경은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쓴 것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그것들 중 정경과 외경, 위경을 구분하여 편집했던 지역 교회들과 공의회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주장은 근본적으로 자기모순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성경”이라는 책 목록 자체가 전통과 교회의 권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산물이기 때문이다.
- 중세 가톨릭의 성경 개인 소유/읽기 금지령
이 주장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례가 툴루즈 공의회인데, 이 공의회는 니케아 공의회처럼 보편 공의회가 아니라 지역 주교가 소집한 지방 공의회였다. 나라로 치면 “국무회의”가 아니라 “시·도의회 수준”의 결정이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그 권위는 지역적이며 제한적이었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알비주파(카타리파) 등 이단 운동이 매우 활발했고, 그들이 자신들의 교리를 퍼뜨리기 위해 왜곡된 성경 번역본을 대량으로 배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단들이 배포하는 비정통 번역본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일반 신자의 성경 소지와 '해설 없는 개인 해석'을 한시적으로 제한한 것이었다. 이는 가톨릭 전체의 정책이 아니라 특정 지역에서 특정 시기에 필요한 ‘임시 조치’였으며, 교황청이랑은 관련이 없다.
또한 흔히 퍼지는 “성경은 라틴어만 존재했고, 가톨릭이 번역을 금지했다”는 주장도 거짓이다. 루터보다 훨씬 이전부터 성경은 여러 언어로 널리 번역되어 있었다. 불어, 독일어, 체코어 성경은 이미 13세기에 존재했으며 영어 성경은 14세기에 이미 존재했다. 이태리어,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스칸디나비아어 성경 또한 루터 이전에 존재했다. 가톨릭이 금지한 건 성경 읽기가 아니라 성경을 교도권 밖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금지했다고 봐야지 옳다고 할 수 있다.
- 루터는 오직 성경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
루터가 오직 성경을 외치면서 정작 성경을 번역할 때는 멋대로 번역했다는 사실은 개신교 신학자들도 아는 자명한 사실이다. 로마서 3장 28절을 번역할 때 ‘오직(allein)’이라는 단어를 넣어 번역하였다. 이건 그리스어, 라틴어 성경에도 없던 단어였다. 그러나 루터는 오직 믿음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없던 단어를 넣어 고의로 오역하였다. 오역만 했을 뿐 아니라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며 신약의 맨 뒤로 밀어버렸다. 믿음뿐 아니라 행함으로도 의롭게 된다”라는 구절이 루터의 교리와 대치되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유다서, 요한묵시록도 정경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멋대로 바꿔 번역하는 사람을 종교개혁의 선두주자라고, 성경적인 개혁자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람이 과연 오직 성경을 논할 자격이 있는지는 굉장히 의문이다.
8) 근본 없는 노스탤지어
오직 성경을 주장하면서 사도전승 등 성전(Traditio)을 "그리스도가 아닌 인간이 만든 것"이라 규정하며 버려놓고서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할 때마다 얼마나 웃긴지 모르겠다. 특히 교부들의 주장과 완전히 반대되는 교리를 세워놓고 믿으면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라는 말을 하는 개신교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초대교회를 무슨 만남의 장으로 착각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이 말하는 초대교회는 "성령이 가득 찬 상태로 빵을 나눠먹는 친목의 장"이었다. 하지만 실제 초대교회는 달랐다. 지하 교회에 숨어서 박해에 벌벌 떨며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목숨을 걸고 믿어야 했다. 그리고 지하교회에서 빵을 나눴던 것은 성체를 나누는 것으로, 식량이나 간식 같은 음식의 나눔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기 위한 희생제사였다.
성체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있다. 초대교회는 화체설을 믿었다. 화체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단이라고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개신교는 화체설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각자 성체에 대한 입장이 달랐다. 루터는 공재설(임재는 맞지만 성체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지는 않는다)을 주장했다. 츠빙글리는 기념설(표징이며, 실제로 임재하지 않는다), 칼뱅은 영적 임재설(변화는 없지만 성령이 실제로 임재한다), 웨슬리는 성찬은 은총이 전달되는 자리일 뿐 화체설을 믿지는 않았다. 이런 개신교의 각자 다른 주장은 초대교회 교부들의 주장과도 확연히 달랐다. 이에 대해 에라스뮈스는 "남을 가르치기 전에 너희끼리나 일치하여라"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이나 성찬 같은 예식은 전부 버려놓고 초대교회를 논하는 걸 보면 우습기까지 하다. 초대교회로의 회귀를 논하기 이전에 교부학부터 공부해보는 건 어떨까.
9) 성령은 귀신인가
개신교인들을 보면 예배 도중 울거나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는 것을 성령의 임재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울음과 방언(알 수 없는 횡설수설)은 기독교만의 현상이 아니다. 샤머니즘, 무속, 힌두교, 오순절파와 비슷한 타 종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감정 폭발”이나 “이해할 수 없는 발성”이 과연 성령일까? 성령은 본래 어떤 존재인가? 성경을 보면 성령이 어떤 방식으로 역사하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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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적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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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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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티아 5장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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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자비(친절), 선함, 신실함, 온유, 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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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 11장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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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칠은: 지혜, 통찰, 모략, 용기, 지식, 경외, 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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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토서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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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치유, 기적을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 통역
* 방언은 외국어나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이지만, 통역은 이 방언을 우리가 알 수 있는 말로 번역해 공동체에 줄 수 있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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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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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 봉사, 가르침, 권면, 자선, 지도(다스림), 자비
* 이 은사들은 초자연적 능력보다 공동체 섬김, 사도적 사명에 중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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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서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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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직무적 성령 은사): 사도, 예언자, 복음 선포자, 목자, 교사
* 이 은사들은 현대 교회의 직무직으로 발전했다. |
여기서 보면 은사는 타인에게 봉사를 하라고 주는 것이다. 타인에게 유익하게 쓰일 수 있는 능력이나 성질을 은사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고려해봤을 때, 성령은 사람을 시끄럽게 하거나 감정적으로 고양되게 하여 울게 하는 등 개인 감정에 변화를 주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 은사로 인해 타인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방언도 그렇다. 누군가가 방언을 하면, 누군가는 통역을 할 수 있어야지 성경적으로 맞는데 지금 개신교에서는 방언의 은사만 있고, 통역의 은사는 아무도 갖고 있지 않다. 이래도 그 방언들이 은사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떠한 재능이 은사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내가 지금 받는 감정과 이 행동이 사람을 성숙하게 하고, 질서 있게 하고,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에 쓰이고 있는지 반드시 재고해봐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예언할 수 있기를 더 바랍니다.
누가 해석을 해 주어 교회가 성장에 도움을 받는 경우가 아니면,
예언하는 이가 신령한 언어로 말하는 이보다 더 훌륭합니다.
- 1코린 14, 5
10) 무식함을 조장하는 문화
위의 아홉 가지 문제를 낳은 가장 근본 원인은 결국 무식함, 즉 신앙의 기본을 이루는 성경·전통·교리·역사에 대한 심각한 무지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사리분별이 안 된다. 성경을 제대로 읽으려면 그 텍스트에 대한 올바른 해석 능력, 최소한의 문해력, 그리고 역사적·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당연히 필요하다. 괜히 그 수많은 신학자들이 성서학이란 학문을 공부하고 연구한 것이 아니다. 올바로 알아야지 올바로 적용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걸 경시하고, 교회에서 어떤 관점으로 어떻게 읽어야 할지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고 개인이 읽어야 한다고만 강조하니 성서를 잘못 해석했을 때 그것을 막아줄 방법도, 해석이 옳은지 그른지 분별할 방법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쉽게 이단에 빠지는 것이다.
또한 이런 현상을 낳게 만드는 교리 교육에서도 깊은 심각함을 느꼈다. 새가족 교육에서 신앙생활에 필요한 지식이나 성경 해석에 필요한 부분들은 전혀 설명해주지 않고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받았다", "모든 건 성경에 나와있다"라고만 말한다. 그러다 그 지식을 요구하면 "그게 뭐가 중요하냐,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말로 어물쩡 넘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 얕은 지식의 상태로 감정만 차 이런저런 얘기를 해대니 외부인들이 들었을 때 개신교의 교리들이 허무맹랑한 얘기와 자신들에 대한 저주로 들릴 수밖에.
초대교회 교부들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성경과 신학을 깊이 탐구하기 위해 그리스 철학 등 다양한 학문을 연구했고, 서방 문화권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현지의 언어와 그들의 사유 체계를 익혀 복음을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했다. 그런 지적 노력과 치열한 탐구가 있었기에 박해 속에서도 신앙이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부흥을 논하면서도 자기 종교의 가장 기본적인 지식조차 모르고, 설명할 능력조차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그리고 이 상황에 대한 어떠한 심각성도 못 느끼고 있다. 이런 집단이 무슨 수로 부흥할 수 있을까?
부흥을 떠나 한국 개신교는 본인들이 그리스도의 적이 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목사가 앞에서 무엇을 말하든, 그 말이 맞는지 틀린지 판단할 수 있는 최소한의 분별력은 필요한데, 이 분별력을 가진 사람을 "교만"으로 낙인찍는다. 이런 식으로 매주 가스라이팅을 당하니 설교 내용이 엉망진창이어도 그게 옳은지 그른지 식별조차 못하고 받아 적기만 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성경 본문과 정반대의 말을 해도 “아멘”을 외쳐버리는 사람들도 꽤 많이 봤다.
결국 배우지 않고, 알아보지 않고, 질문하지 않게 만든 환경이 성경 해석의 왜곡, 교리의 부재, 감정주의, 반지성주의의 주류화라는 최악의 상황을 낳은 셈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무지를 미덕처럼 여기는 풍토에서 건전한 신학과 합리적 분별은 자라날 수 없다. 문제는 단순히 몰랐다는 데 있지 않다. 무지를 스스로 선택하고, 무지를 신앙으로 포장한다는 데 있다.
추가 코멘트
일단 생각나는 부분이 여기까지라 이 정도로만 적어봤다. 이외에 더 생각난 부분이 있으면 이후에 덧붙일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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