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I converted from Protestant to Roman Catholicism?

원래 이에 대해 썼던 글이 있었지만, 업데이트 하고 싶은 내용이 있어 다시 올려본다. 일단 난 4대째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양가가 그런 건 아니고, 친가 쪽이. 외가 쪽은 제사만 지내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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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이야기하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개인사나 사회적인, 역사적인 문제 때문에 개종한 것도 맞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게 내 개종 고민의 시발점이었던 것은 맞지만 개종의 결정타는 아니었다. 실제로 내가 개종하기로 한 원인은 개신교, 특히 한국의 복음주의 개신교의 여러 부분에 동의하지 못해서 개종한 게 컸다. 이번 글에서는 내가 어떤 부분에 동의하지 못해서, 맞지 않아서 개종하게 되었는지 써보려고 한다.

 


 

1) 예배 방식

 

  개신교 다니면서 매번 의문이었던 부분이 세 가지였다. '이렇게 시끄럽고 과도한 액션을 취해야 하는가', '말씀 봉독 조금에 저렇게 긴(혹은 필요없는 이야기들을 하며) 부연설명이 필요한가', '이런 행위를 굳이 일주일에 한 번, 그리고 한 시간 반 씩이나 해야 하는가'. 교파마다 다르긴 하지만 성공회나 루터회 같은 고교회가 아닌 이상, 보통의 개신교 예배는 찬양 + 대표기도 + 봉독 + 설교 + 통성기도 + 축도로 이어진다. 가끔 사도신경을 외우고 시작하는 교회들도 있지만, 내가 간 대형교회는 그것조차 하지 않았다.

 

 찬양이 너무 길다. 찬양만 20~30분 정도 하는 것 같은데, 거룩한 느낌이나 진지한 느낌보단 콘서트 같았다. 그렇게 콘서트 같던 찬양이 끝나면 대표기도가 시작된다. 대표기도의 주제는 대부분 부흥 이야기나 '성령이 임해서 목사님이, 성도들이 ~하게 해주시고'와 같은 기도가 대부분이다. 괴로운 시간을 지나고 있는 어려운 이들에 대한 기도는 거의 하지 않는다. 이후 말씀 봉독은 많아봐야 10줄 내외다. 그리고 설교라는 이름으로 이것에 대한 주석이나 개인 썰풀기가 40분 정도 이어진다. 이런 방식이 구약(혹은 묵시록)-시편-신약 서간-복음서 봉독의 형식을 취하는 전례교회에 비해 이게 성경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지 솔직히 의문이다. 이후 부흥과 복음화(= 신자들 늘어나게 해달라~), 나라를 위한 기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나라가 되게 해달라~)를 놓고 10분 내외로 통성기도를 한다. "주여~~~~"하고 목사가 외치면 사람들이 손을 들고 감정에 취해서 소리치며 기도한다. 눈물을 흘리거나 방언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러면 전례교회는 어떻게 할까? 크게 보면 입당송 + 성호경 + 고백기도/말씀전례(구약-시편-신약 서간-복음서 + 강론 - 보편지향기도)/영성체(사도신경+봉헌+주님의기도+평화인사+성찬)/파견(강복 - 파견성가)로 진행된다. 조용하고 경건하게 진행되며 고양된 감정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절차 안에 그리스도인이라면 기억해야 하는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보편지향기도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때는 가난한 이를 위해, 난임 부부들을 위해, 자살의 유혹을 겪은 이들을 위해 등등 세계에 있는 다양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이렇게 전례(미사)에 참여해보고 나서야 내가 왜 개신교 예배가 불편하게 느껴졌는지 알게 되었다.

 

 전례는 ‘감정의 발화’가 아니라 ‘신앙의 기억과 전통’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간단한 형식 안에 감정 고양만을 추구하는 것들이 들어있는 것보다 형식 안에 필요한 기도와 말씀들이 담겨있는 전례교회가 나는 옳다고 생각한다.

 

 

2) 꼬리 자르기

 

 내가 굉장히 싫어했던 부분이다. 어느 교회나 신자가 잘못된 행동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꼭 나오는 이야기이다. '일부 교회의 만행으로 개신교 전체를 폄하하지 마세요', '노력하고 있는 목사님/산자들도 많아요', '쟤는 이단/사이비라 그래요', '우리 교회는 안 그래요'까지. 이 말들을 하나하나 분석해보기로 하자.

 

  • 일부 교회의 만행으로 개신교 전체를 폄하하지 마세요. / 노력하고 있는 목사님과 신자들도 많아요.
중세의 천주교는 굉장히 타락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 중에도 바른 삶과 선행으로 산 사람들이 분명히 많았다.(누가 그렇게 살았는지 궁금하다면 16세기에 살았던 가톨릭 성인들의 삶을 알아보면 된다.) 하지만 이 성인들이 선행을 하고 좋은 삶을 살았다고 해서 가톨릭이 타락하지 않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일부 교황과 성직자들로 인해서 천주교 전체가 폄하당했다고 변호해주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제 저 문장에 있는 중세/천주교/성직자(성인)들을 빼고, 현대/개신교/목사라는 단어를 대입해보자. 그러면 지금 개신교에 딱 맞는 문장이 된다.

 

 그리고 이 '일부'라는 말부터 굉장히 잘못됐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니케아 신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조건에 '하나되고 보편되며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고 되어 있다. 이 사람들을 일부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 교회와 저 사람들 모두 하나되지도 않고, 보편되지도 않다는 것을 스스로 천명하는 꼴이다. 일부라는 말을 뱉음으로써 '우리는 교회 조건 네 개중 두 개나 안 맞는 교회입니다'를 스스로 실토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문장이 왜 틀렸는지 보자. 특히 이 얘기를 할 때 방패로 내세우는 교회는 시골에 있는 작은 교회 목사님들인데, 평소에는 대형교회와 시설 좋고 사람 많은 교회로 우르르 몰려가 예배하면서 왜 본인들 불리할 때만 개척교회 목사들이나 신자들을 찾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단 몇몇의 선한 사례가 구조적 타락을 상쇄할 수는 없다. 이는 위 문장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 쟤는 이단/사이비라 그래요.

 잘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이단/사이비이고 본인네 일이 아니라고 한다. 전광훈은 처음부터 자기 교단을 파서 목회를 했었나? 만민중앙교회는 처음부터 이단/사이비였나? 인분 먹이고 매 맞게 한 빛과진리교회는 예장합동인데, 예장합동도 이단/사이비라고 할 것인가? 조용기 목사는? 이런 방관과 꼬리자르기는 수많은 이단/사이비의 출현을 조장하는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사이비'라는 말의 정의를 다시 보자.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사이비란 '겉으로는 비슷하나 본질은 다른 것'을 뜻한다. 겉으로는 교회 같아 보이지만 교회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타락한 교단과 교회들한테 적용하면 딱 맞는 말이 아닌가.

 

 

  • 우리 교회는 안 그래요.

 들을 때마다 제일 답답한 말이 단연 이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람들은 한 교회만을 놓고 비판하는 게 아니다. 개별 교회를 묶는 교단과 많은 교회의 흐름, 신자들의 행동 흐름을 보고 비판하는 것이다. 위에도 말했지만 어느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해서 지금 교단과 교회들의 타락이 막아지지는 않는다.

 

 가령 개한테 물려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 사람한테 개를 들이밀며 '우리 개는 안 물어요'라고 말하는 게 과연 옳은 언행일까? 그리고 '우리 개는 안 문다'라는 사실이 입질이 심한 수많은 개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덮을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3) 개신교에 대한 도덕적 잣대가 높다는 망상

 

 이 질문에 답해보자.

 

  • 천주교 신자들이 개신교는 이단이라면서 개신교회의 시설물 곳곳에 배뇨를 했다고 해보자. 이 사람이 욕을 먹는다면 그 이유는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아서일까, 아니면 타 시설물에 들어와 오줌을 싸는 비도덕적 행위를 해서일까?
  • 스님들이 길거리에 나와 '부처열반 불신윤회'를 외쳤다고 해보자. 이 스님들은 당연히 욕을 먹을 것이다. 사람들이 이 스님을 욕하는 건 부처를 닮지 않아서일까, 종교를 강요해서일까?
  • 무슬림들이 학살과 전쟁을 일으킨다. 사람들이 무슬림들을 욕한다면 무슬림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 그런 걸까, 학살과 폭력을 자행해서 그런 걸까?

 

 어떠한 종교를 믿는 사람이 본인이 믿는 신을 잘 따르는지 아닌지, 도덕적으로 훌륭한지 아닌지에 대해서 사람들은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사람들이 종교인에게 바라는 건 오직 세 가지이다. 본인의 종교를 강요하지 않으며, 타 종교를 비하하지 않고, 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것. 현재의 개신교가 욕을 먹는 이유는 이 세 가지를 전부 어겨서이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고사하고 상종하기 싫게끔 몰상식적인 행동을 하는데 사람들이 고운 시선으로 봐주기를 바라온 것이라면 다음 성경 구절을 떠올려보기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루카 6, 31)

 

 

 

4) 교리는 중요하지 않다는 거짓말

 

 종종 개신교 신자들에게 그런 말을 듣는다. "전례 교회(특히 천주교)는 너무 교리 중심이고 율법 중심이야. 개신교는 예수님의 사랑과 선행을 중시하지 교리를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더 성경적이야." 혹은 "교리? 그게 뭐가 중요해? 내가 예수님과 친밀하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난 이런 사람들에게 반대로 물어본다.

 

  • 근데 왜 제삿날마다 싸워? 니들이 율법주의적라고 욕하는 천주교도 제사와 절이 허용되는데 왜 교리가 안 중요한 개신교는 절 안 해서 명절마다 분위기 흐리고 싸울까?
  • 근데 왜 성인 공경, 성모 공경을 우상 숭배로 봐? 그냥 롤모델 존경하는 정도로 보면 되잖아?
  • 교리 안 중요한데 왜 일요일날 예배 빠지는 건 용납을 못해?
  • 누구보다 성경 읽기와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야. 근데 십일조는 안 내. 넌 이 사람을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해줄 수 있니?
  • 왜 요한묵시록(요한계시록) 12장의 여인을 마리아로 해석하지 않고 교회라고만 해석해? 교부들은 마리아로 해석하는데?
  • 회개하고 복음을 전하라고 해서 전도하는 거 아니야? 교리가 안 중요한데 무례하게라도 전도하는 이유가 뭐야?

 

 누구보다 교리를 사랑하고 칼같이 지키려는 개신교가 자유로운 종교인 척 하는 걸 보면 웃기지도 않다. 이제 교리가 안 중요하다는 거짓말은 그만하자. 교리가 안 중요한 종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5) 발의되지도 않은 법을 반대하는 기이한 현상

 

 작년 개신교계에선 1027 연합 예배라는 이름으로 입법되지도 않은 포괄적 차별금지법 반대 시위를 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도입되면 전도를 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LGBT 사람들이 늘어나 문란한 사회가 도래할 것이다."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민주당이 되면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킬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왜 그들의 주장이 틀렸는지 하나하나 뜯어서 설명하겠다.

 

  • 소수자는 소수자일 뿐이며, 문란은 개인의 도덕성 차이일 뿐.

 소수자는 소수자일 뿐이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든 말든, 성소수자의 수가 갑자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일은 없다. 성적 지향은 인류 집단 안에서 일정한 비율로 존재해온 정체성이다. 그리고 사회가 ‘문란해지느냐’는 성적 지향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도덕성, 성적 행동 방식, 사회적 규범의 문제다. 이성애자라고 해서 더 도덕적이거나 건전하다는 보장은 없으며, 동성애자라고 해서 인성이 나쁘거나 문란한 것도 아니다. 성병 감염 패턴 역시 ‘성적 지향’보다 위험한 성적 행동의 방식이 훨씬 더 큰 요인이다. 특정 집단의 성적 지향이 문제가 아니라, 콘돔 사용 여부, 성매매 여부, 다수 파트너 여부, 검사·치료 접근성 등의 요소가 감염률을 크게 좌우한다. 즉, ‘동성애 = 문란’이라는 도식은 사실과도 맞지 않고, 논리적으로도 성립하지 않는다. 이는 성적 지향 자체가 문란함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성적 행동이 이루어지는지가 감염 위험을 좌우한다는 연구들에서도 나타난다.

 

 

  • 차별금지법이 도입되면 전도가 안 된다?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를 헌법에서 보장해주는 국가이다. 이 종교의 자유에는 신앙 생활의 자유도 포함되어 있으며, 신앙 생활의 자유 안에는 포교의 자유(전도의 자유)도 포함이 된다. 이 법이 종교의 자유를 위반하는, 그러니까 헌법을 위반하는 법이라면 상위법을 위반한 하위법인 동시에 위헌이다. 이러한 법은 생길 수도 없으며, 만일 생겼다고 해도 위헌으로 판정되어 헌법재판소 측에서 폐지를 요구할 것이다.

 

 

  • 민주당이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킬 것이다/입법을 시도하고 있다

 지금 친명계 내각의 인사들을 보자. 지금 국무총리가 된 김민석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며, 신앙적 근거에 따라 차별금지법을 반대했다. 친명계 의원 중 한 명인 이언주도 동일했다. 이언주는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적이 없다"라고 밝혔으며, 개인적으로도 개신교 신자로서 차별금지법 발의를 반대하고 있다. 민주당에서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법안"이라며 논의부터 미뤄뒀으니 더욱 걱정할 필요가 없다. 특히 지금 민주당 지도부인 박찬대와 정청래도 매우 독실하기로 유명한 안수집사인데 어디가 그렇게 걱정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6) 선택적인 정죄

 

  개신교의 어떤 폐단에 대해 지적하면 상당수의 개신교인들이 "정죄하지 말고 기도해라"라고 말한다. 그게 아니면 "기도하는 방법 밖에 없지"라는 말로 묵인을 선택했다. 내가 본 개신교인들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쇄신하지?"를 논하지 않고, "이 불편한 비판을 어떻게 무마하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런 비판을 들을 때면 "어떻게 고쳐야 할까?"를 논의하려 하지 않고 늘 "우리 교회(목사님)은 안 그래", "거긴 이단/사이비야", "거긴 일부야. 다른 곳은 안 그래"라는 말로 비판을 흐리는 데만 급급했다. 자신들에 대한 비판은 정죄니까 하지 말라고 하면서 정작 본인들은 동성애자나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에 대해 죄인이니 적그리스도니 하며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을 동반해 정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사고가 가능하긴 한지 의문이 들었다.

 

 동성애자에 대해서는 죄인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전광훈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동성애자를 축복한 목사는 즉시 출교를 해버리지만, 성범죄 목사의 출교 재판은 미룬다.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시위나 기도, 서명운동에는 열심히 참여하면서 위헌인 12.3 사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내가 제일 어이없었던 순간은 어느 대형교회 목사가 청년부 톡방에 올린 글을 읽은 때였다. "대통령을 비판하지 말고 나라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라"며 계엄에 대한 비판을 삼가라는 장문의 궤변을 는 말로 비판을 삼가라는 의도의 글을 썼다. 나는 이걸 쓴 목사도 그렇지만, 이 글에 어떤 분별력도 갖지 않고 수긍하는 청년들이 더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매번 부흥을 논하는 사람들이 신앙적인 사고는 고사하고 민주주의 아래 사는 국민으로서의 분별력도 없다면 그 사람들이 사제직, 왕직, 예언자직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뿐만이 아니다. 본인네 교파에서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사건이었던 모 대형교회 과로사 사건, 아프간 피랍사건, 수많은 성범죄 목사 등에서뿐만 아니라 청교도가 미국에서 일으킨 사건, 가톨릭이 화형을 폐지한 이후에도 쭉 화형을 지속해온 점 등에 대해서는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 반성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본인네 교파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면서 그저 약 500년 전 중세 천주교의 부패에서 벗어나 개혁을 시도했다는 것만 몇 세기 동안 훈장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개혁과 쇄신을 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를 향해 수많은 정죄를 쏟아내고 있다. 이래도 개신교가 진정한 개혁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

 

 

 

7) 성경에 대한 왜곡된 시각

 

  • 성경의 정경화 작업으로 보는 오직 성경이 틀린 이유

 

 교파마다 살짝씩 다르긴 하지만 개신교는 66권, 천주교 73권, 정교회 76권을 성경으로 인정한다. 일단 세 교파 모두 신약은 27권으로 동일하다. 가톨릭은 초대교회에서 쓰던 70인역 성경을 구약 성경으로 인정했고, 개신교는 유대교와 동일하게 히브리어 원본이 발견되지 않은 39권만을 인정했다. 정교회는 가톨릭에서 인정하지 않은 부분을 추가로 더 인정해 76권이 되었다. 이 정경화 과정에서 구약, 신약 모두 빠진 부분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 이 책을 넣고 빼고는 누가 결정했을까? 교회가 결정했다.

 

 성경의 정경은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쓴 것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그것들 중 정경과 외경, 위경을 구분하여 편집했던 지역 교회들과 공의회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주장은 근본적으로 자기모순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성경”이라는 책 목록 자체가 전통과 교회의 권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산물이기 때문이다.

 

 

  • 중세 가톨릭의 성경 개인 소유/읽기 금지령

 

 이 주장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례가 툴루즈 공의회인데, 이 공의회는 니케아 공의회처럼 보편 공의회가 아니라 지역 주교가 소집한 지방 공의회였다. 나라로 치면 “국무회의”가 아니라 “시·도의회 수준”의 결정이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그 권위는 지역적이며 제한적이었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알비주파(카타리파) 등 이단 운동이 매우 활발했고, 그들이 자신들의 교리를 퍼뜨리기 위해 왜곡된 성경 번역본을 대량으로 배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단들이 배포하는 비정통 번역본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일반 신자의 성경 소지와 '해설 없는 개인 해석'을 한시적으로 제한한 것이었다. 이는 가톨릭 전체의 정책이 아니라 특정 지역에서 특정 시기에 필요한 ‘임시 조치’였으며, 교황청이랑은 관련이 없다.

 

 또한 흔히 퍼지는 “성경은 라틴어만 존재했고, 가톨릭이 번역을 금지했다”는 주장도 거짓이다. 루터보다 훨씬 이전부터 성경은 여러 언어로 널리 번역되어 있었다. 불어, 독일어, 체코어 성경은 이미 13세기에 존재했으며 영어 성경은 14세기에 이미 존재했다. 이태리어,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스칸디나비아어 성경 또한 루터 이전에 존재했다. 가톨릭이 금지한 건 성경 읽기가 아니라 성경을 교도권 밖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금지했다고 봐야지 옳다고 할 수 있다.

 

 

  • 루터는 오직 성경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

 

 루터가 오직 성경을 외치면서 정작 성경을 번역할 때는 멋대로 번역했다는 사실은 개신교 신학자들도 아는 자명한 사실이다. 로마서 3장 28절을 번역할 때 ‘오직(allein)’이라는 단어를 넣어 번역하였다. 이건 그리스어, 라틴어 성경에도 없던 단어였다. 그러나 루터는 오직 믿음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없던 단어를 넣어 고의로 오역하였다. 오역만 했을 뿐 아니라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며 신약의 맨 뒤로 밀어버렸다. 믿음뿐 아니라 행함으로도 의롭게 된다”라는 구절이 루터의 교리와 대치되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유다서, 요한묵시록도 정경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멋대로 바꿔 번역하는 사람을 종교개혁의 선두주자라고, 성경적인 개혁자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람이 과연 오직 성경을 논할 자격이 있는지는 굉장히 의문이다.

 

 

8) 근본 없는 노스탤지어

 

 오직 성경을 주장하면서 사도전승 등 성전(Traditio)을 "그리스도가 아닌 인간이 만든 것"이라 규정하며 버려놓고서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할 때마다 얼마나 웃긴지 모르겠다. 특히 교부들의 주장과 완전히 반대되는 교리를 세워놓고 믿으면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라는 말을 하는 개신교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초대교회를 무슨 만남의 장으로 착각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이 말하는 초대교회는 "성령이 가득 찬 상태로 빵을 나눠먹는 친목의 장"이었다. 하지만 실제 초대교회는 달랐다. 지하 교회에 숨어서 박해에 벌벌 떨며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목숨을 걸고 믿어야 했다. 그리고 지하교회에서 빵을 나눴던 것은 성체를 나누는 것으로, 식량이나 간식 같은 음식의 나눔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기 위한 희생제사였다.

 

 성체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있다. 초대교회는 화체설을 믿었다. 화체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단이라고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개신교는 화체설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각자 성체에 대한 입장이 달랐다. 루터는 공재설(임재는 맞지만 성체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지는 않는다)을 주장했다. 츠빙글리는 기념설(표징이며, 실제로 임재하지 않는다), 칼뱅은 영적 임재설(변화는 없지만 성령이 실제로 임재한다), 웨슬리는 성찬은 은총이 전달되는 자리일 뿐 화체설을 믿지는 않았다. 이런 개신교의 각자 다른 주장은 초대교회 교부들의 주장과도 확연히 달랐다. 이에 대해 에라스뮈스는 "남을 가르치기 전에 너희끼리나 일치하여라"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이나 성찬 같은 예식은 전부 버려놓고 초대교회를 논하는 걸 보면 우습기까지 하다. 초대교회로의 회귀를 논하기 이전에 교부학부터 공부해보는 건 어떨까.

 

 

9) 성령은 귀신인가

 

 개신교인들을 보면 예배 도중 울거나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는 것을 성령의 임재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울음과 방언(알 수 없는 횡설수설)은 기독교만의 현상이 아니다. 샤머니즘, 무속, 힌두교, 오순절파와 비슷한 타 종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감정 폭발”이나 “이해할 수 없는 발성”이 과연 성령일까? 성령은 본래 어떤 존재인가? 성경을 보면 성령이 어떤 방식으로 역사하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성서적 근거
종류
갈라티아 5장 22-23
성령의 열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자비(친절), 선함, 신실함, 온유, 절제
이사야서 11장 2-3
성령칠은: 지혜, 통찰, 모략, 용기, 지식, 경외, 경건
코린토서 12장
은사: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치유, 기적을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 통역


* 방언은 외국어나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이지만, 통역은 이 방언을 우리가 알 수 있는 말로 번역해 공동체에 줄 수 있어야 한다.
로마서 12장
은사: 봉사, 가르침, 권면, 자선, 지도(다스림), 자비


* 이 은사들은 초자연적 능력보다 공동체 섬김, 사도적 사명에 중점
에페소서 4장
은사(직무적 성령 은사): 사도, 예언자, 복음 선포자, 목자, 교사


* 이 은사들은 현대 교회의 직무직으로 발전했다.

 

 여기서 보면 은사는 타인에게 봉사를 하라고 주는 것이다. 타인에게 유익하게 쓰일 수 있는 능력이나 성질을 은사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고려해봤을 때, 성령은 사람을 시끄럽게 하거나 감정적으로 고양되게 하여 울게 하는 등 개인 감정에 변화를 주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 은사로 인해 타인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방언도 그렇다. 누군가가 방언을 하면, 누군가는 통역을 할 수 있어야지 성경적으로 맞는데 지금 개신교에서는 방언의 은사만 있고, 통역의 은사는 아무도 갖고 있지 않다. 이래도 그 방언들이 은사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떠한 재능이 은사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내가 지금 받는 감정과 이 행동이 사람을 성숙하게 하고, 질서 있게 하고,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에 쓰이고 있는지 반드시 재고해봐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예언할 수 있기를 더 바랍니다.
누가 해석을 해 주어 교회가 성장에 도움을 받는 경우가 아니면,
예언하는 이가 신령한 언어로 말하는 이보다 더 훌륭합니다.

- 1코린 14, 5

 

 

10) 무식함을 조장하는 문화

 

  위의 아홉 가지 문제를 낳은 가장 근본 원인은 결국 무식함, 즉 신앙의 기본을 이루는 성경·전통·교리·역사에 대한 심각한 무지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사리분별이 안 된다. 성경을 제대로 읽으려면 그 텍스트에 대한 올바른 해석 능력, 최소한의 문해력, 그리고 역사적·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당연히 필요하다. 괜히 그 수많은 신학자들이 성서학이란 학문을 공부하고 연구한 것이 아니다. 올바로 알아야지 올바로 적용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걸 경시하고, 교회에서 어떤 관점으로 어떻게 읽어야 할지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고 개인이 읽어야 한다고만 강조하니 성서를 잘못 해석했을 때 그것을 막아줄 방법도, 해석이 옳은지 그른지 분별할 방법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쉽게 이단에 빠지는 것이다.

 

 또한 이런 현상을 낳게 만드는 교리 교육에서도 깊은 심각함을 느꼈다. 새가족 교육에서 신앙생활에 필요한 지식이나 성경 해석에 필요한 부분들은 전혀 설명해주지 않고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받았다", "모든 건 성경에 나와있다"라고만 말한다. 그러다 그 지식을 요구하면 "그게 뭐가 중요하냐,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말로 어물쩡 넘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 얕은 지식의 상태로 감정만 차 이런저런 얘기를 해대니 외부인들이 들었을 때 개신교의 교리들이 허무맹랑한 얘기와 자신들에 대한 저주로 들릴 수밖에.

 

 초대교회 교부들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성경과 신학을 깊이 탐구하기 위해 그리스 철학 등 다양한 학문을 연구했고, 서방 문화권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현지의 언어와 그들의 사유 체계를 익혀 복음을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했다. 그런 지적 노력과 치열한 탐구가 있었기에 박해 속에서도 신앙이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부흥을 논하면서도 자기 종교의 가장 기본적인 지식조차 모르고, 설명할 능력조차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그리고 이 상황에 대한 어떠한 심각성도 못 느끼고 있다. 이런 집단이 무슨 수로 부흥할 수 있을까?

 

 부흥을 떠나 한국 개신교는 본인들이 그리스도의 적이 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목사가 앞에서 무엇을 말하든, 그 말이 맞는지 틀린지 판단할 수 있는 최소한의 분별력은 필요한데, 이 분별력을 가진 사람을 "교만"으로 낙인찍는다. 이런 식으로 매주 가스라이팅을 당하니 설교 내용이 엉망진창이어도 그게 옳은지 그른지 식별조차 못하고 받아 적기만 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성경 본문과 정반대의 말을 해도 “아멘”을 외쳐버리는 사람들도 꽤 많이 봤다.

 

 결국 배우지 않고, 알아보지 않고, 질문하지 않게 만든 환경이 성경 해석의 왜곡, 교리의 부재, 감정주의, 반지성주의의 주류화라는 최악의 상황을 낳은 셈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무지를 미덕처럼 여기는 풍토에서 건전한 신학과 합리적 분별은 자라날 수 없다. 문제는 단순히 몰랐다는 데 있지 않다. 무지를 스스로 선택하고, 무지를 신앙으로 포장한다는 데 있다.

 

 


 

추가 코멘트

 

  일단 생각나는 부분이 여기까지라 이 정도로만 적어봤다. 이외에 더 생각난 부분이 있으면 이후에 덧붙일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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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에 대해 썼던 글이 있었지만, 업데이트 하고 싶은 내용이 있어 다시 올려본다.


 

  일단 난 4대째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양가가 그런 건 아니고, 친가 쪽이. 외가 쪽은 제사만 지내는 무종교. 그렇다고 우리 엄마가 종교에 대해 희생을 감수하고 결혼했던 건 아니다. 엄마는 종교가 없었을 뿐더러, 엄마가 살던 동네에는 교회도 없었다. 엄마는 아빠가 교회 출석에 대한 어떠한 강요도 없고, 타종교에 대한 어떤 근본주의적 생각이나 흑백논리도 없어서 오히려 호감이었고, 그래서 세례를 받고 잠시 다녔던 거라고 했다.

 

 친가쪽은 양가 모두 개신교 집안이었다. 할아버지 쪽은 할아버지 포함 14명 정도의 형제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큰 집안의 장남이라 상속받은 유산이 굉장히 많았다. 정확한 액수를 알 수는 없으나 듣기로는 평생 일하지 않아도 서울에서는 중산층 정도의 삶을, 지방에서는 최상위의 삶을 살 수 있는 정도였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다른 형제들이 사업 자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할아버지한테 자주 돈을 요구했고, 할아버지는 형제니까 그냥 주셨다고 한다.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여러 번 돈을 요구하니 돈은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그 돈이 거의 바닥이 나서 돈을 벌기 위해 취직을 해야 했다. 그렇게 취직한 곳이 한국제지 공장 감독. 하지만 감독을 하던 중 종이 펄프가 할아버지 다리에 떨어지는 바람에 한쪽 다리를 못 쓰시는 장애를 갖게 되었고, 할머니가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 왔다. 그렇게 할머니가 장사를 시작했는데, 그때도 이 염치없는 형제들은 돈을 요구했다. 그 사람들의 극성스러운 요구에 지친 친가는 할머니의 동생이 사는 지방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지금 살고 있는 지방에 정착하게 되었다. 정착 후 2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고, 할아버지는 췌장암으로 돌아가시게 됐다. 지방에 내려온 뒤 20년동안 우리 친가를 쳐다도 안 보던 그 염치없는 13명의 형제들은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되어서야 지방에 찾아왔다. 이 사람들은 비열하게도 아빠가 자리를 비웠을 때, 그것도 할머니만 있을 때 찾아와서 "불여시같은 네가 우리 형제를 잡아 먹었다"와 같은 폭언을 일삼으며 깽판을 치고 갔다. 이 깽판을 친 형제들이 모두 개신교인이었다.

 

 할머니 쪽 집안도 사정은 있었다. 할머니 쪽 집안도 모두 개신교였다. 할머니는 8살 때 6.25라는 큰 사건을 겪어야 했고, 할머니의 아버지는 북한 출신이 아님에도 미군에게 학살당했다. 할머니의 어머니는 남편이 미군에게 학살당하는 모습을 본 후 '미국 종교의 신을 내가 왜 믿었나?'라는 의문을 품게 되고, 개신교에 대한 염증을 느끼게 된다. 아랍의 유일신 야훼를 미국 종교의 신이라고 보는 건 논리적으로 무리가 있지만, 한국 개신교가 미국 복음주의 개신교가 들어와서 생긴 종교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았나 생각된다. 아무튼 할머니의 어머니는 그렇게 개신교와 그 신에게 염증을 느끼게 됐고 불교로 개종 후 암자로 들어가 여생을 보내셨다.

 

 그럼에도 할머니와 아빠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할머니는 권사, 아빠는 집사. 아빠의 말로는 그런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종교를 버릴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빠와 할머니는 꽤나 독실한 신자였다. 나는 그런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받았고, 엄청 어린 나이일 때부터 일요일은 당연히 교회를 나가는 날이라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니게 됐다. 하지만 여섯 살, 일곱 살 즈음 되어서는 '(근본주의적) 성경무오설', '일요일에 교회 안 가면 지옥', '안 믿으면 지옥', '보지 않고 믿는 자 복되도다', '믿는 사람은 무조건 천국'과 같은 교리의 이상한 모순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 토론할 지식과 언변이 없어 입을 닫고 교회에 다니고 있던 중 아빠가 교회를 안 나가기 시작했다. 

 

 아빠는 이명박 정권 전후로 개신교 신자들의 만행을 보고 나서 35년 간의 개신교 생활을 정리했다. 그렇다고 무신론자가 된 것은 아니고, 개신교에서 더 이상 신앙생활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내게 개신교를 떠날 생각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다. 한 번은 제주도에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탔는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주기도문 문구가 생각났다. 그리고 하늘을 봤는데 아무도 없었다. 하늘에 계신다고 하기에 하늘에 있을 줄 알았는데 하늘에는 구름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때부터 나는 '목사님이 헌금 벌기 위해 거짓말을 팔고 다니기 위해 만든 것이 교회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도 이 종교를 탈출할, 정확히 말하면 교회를 나가지 않을 명분이 내겐 없었다.

 

 

그러다 교회에 안 나가도 되는 명분을 찾게 된다.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다른 초등학교로 전학을 간 뒤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학 간 초등학교는 유명한 사찰 근처에 있는 학교였다. 여기가 나름 큰 문화유산이라 그 절과 학교가 MOU를 맺고 있어 자주 그 절에 드나들 수 있었다. 그리고 스님에게 불교에 관련된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그때 스님은 누구든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저는 교회에 다니는데, 저도 부처가 될 수 있나요?"라고 물으니 그 스님이 "종교가 무엇이든 깨달음을 얻는다면 부처가 될 수 있어요"라고 하셨다. 난 그 말에 무척 감동을 받았다. 개신교에서는 그리스도인일 수는 있어도 선행을 한다하여 하나님이 될 수는 없는데 여기는 그게 가능하구나! 지금 생각해보면 양쪽 교리 둘 다 잘 모르는 상태로 얕은 마음으로 속단한 거였지만. 그렇게 나는 불교라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며 개신교의 교리가 무척 비합리적이란 생각이 들었고, 그 뒤로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가끔 할머니의 간청으로 여름성경학교나 크리스마스 예배에 참석한 적은 있지만 그때도 신앙심이 있어서 간 것은 아니었다.

 

그 뒤로 여러 일들을 겪으며 난 무신론자(불가지론자, 반신론자)가 되었다. 개신교인들의 기괴한 만행들이 언론에 많이 보도된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나는 실제로 겪은 일들이 너무 많았다. 과도한 노방전도와 저주(너는 불교니까 구원을 못 받는다), 성서문자주의적인 발언들, 그리고 학교에 다니면서 만난 개신교 친구 대부분들이 근본주의자였고 또 전광훈을 옹호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사람들에게 반박을 할 때 하더라도 개신교 자체를 미위하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교회를 안 다닌지 14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나는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국비학원에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세 타입의 개신교 신자를 만나게 된다. 골수 개신교, 개신교 뉴비, 탈교회한 분. 일단 골수 개신교는 같은 수강생이었고, 뉴비랑 탈교회한 분은 강사님임을 먼저 밝히고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골수 개신교는 전형적인 개독이었다. 나와 그 골수 개신교가 종교 얘기를 하다가 탈교회한 그 강사님과도 종교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탈교회한 강사님이 본인은 30년 넘게 다녔고, 집사까지 달고 교회를 안 다니게 됐다고 했다. 그때 그 골수 개신교가 "선생님, 다시 돌아오실 생각은 없으세요?"라고 물었는데, 그때 강사님이 하신 답변이 지금도 내 마음 속에 남아있다.

 

네가 다른 사람 한 명이라도 믿게 한 뒤에 나한테 와서 이야기를 한다면,
그러면 그때 생각해볼게.

 사실 개독이라고는 써놨지만, 그 골수 친구를 처음부터 개독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다. 나는 그냥 '독실하구나' 생각하고 넘겼고, 내가 성경이나 교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그 골수 친구도 '네가 나보다 더 많이 아는 것 같다'고 인정을 했을 정도니까. 근데 그 사람과 팀플을 하면서 '개독'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교회 사역 때문에 주말 전체를 교회에 썼던 것 까지는 그러려니 했지만, 돌아와서도 교회 일을 하며 팀플 일은 대충했다. 대충 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안 한 수준. '좋은 게 좋은 거다'라고 생각하며 다른 팀원과 주말을 반납하고 팀플을 하던 중 그 골수에게 전화가 왔다. 그래서 받았더니 하는 말이 "나 4시에 찬양팀 연습 있는데 할 게 없어서 전화했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할 게 없어서...? 너무 어이가 없고 화났지만 여기까지도 그러려니 했다. 그러다 그 사람이 돌아온 뒤 잠자고 유튜브하는 걸 보고 참고 있던 화가 폭발해버렸다. 원래 팀플 담당하던 강사님에게 이야기 안 하고 해결해보려 했지만 어디다가 풀지라도 않으면 내가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그간 있었던 일들을 모두 글로 담아 다음날 그 강사님한테 보여줬다.

 

 아까 위에서 언급한 그 뉴비가 이 강사님이다. 강사님이 글을 쭉 읽으신 후 나를 바깥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이건 도피성 사역이다. 이럴 거면 선교사나 전도사를 해야지"라고 하셨다. 일단 이 분은 개독은 아니구나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몰려있던 화가 그 말에 다 풀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얘기를 하다보니 이상하게 급발진을 하게 됐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들을 고칠 때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했었는데, 그때 예수님이 안식일이 중요하냐 사람이 중요하냐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교회에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왜 행동은 율법주의자들이랑 똑같이 해요? 마가복음 9장 42절에 남의 믿음 떨어뜨리면 연자맷돌에 묶어 던져버릴 정도로 그 죄가 크다고 나와있는데 왜 그런 건 생각 안 하고 교회만 다니죠? 요즘 개신교는 기본적인 교리 교육이나 성경 내용도 안 가르치나요? 그럴 거면 종교를 왜 믿을까요? 무교인 나보다도 본인네 종교에 대해 아는 게 없고, 행동은 바리새인처럼 하면서 교회 다닌다고 떠들고 다니는 개신교인들을 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요." 강사님은 다 듣더니 내 말에 대한 코멘트는 따로 하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골수와 대화를 해보라는 결론을 내주셨다.

 

 그래서 그 골수랑 대화를 하게 됐고, 여전히 대화는 안 통했다. 20분이면 끝날 내용을 2시간 동안 끌고 있으니 너무 피곤했다. 이대로 대화하면 하루종일 해도 답이 없을 것 같아 급하게 마무리짓고 난 글에다 다시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원글이 없어져서 그대로 인용할 수는 없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원래도 안 다니고 있었지만 더 안 가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도 개신교 집안이었고, 그래서 성서와 교리에 대해 전혀 모르지 않는데 왜 개신교 애들이랑은 말이 더 안 통할까. 독실하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나보다 성경과 교리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다시는 교회에 발도 안 들이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단락을 보고 그 강사님이 잠깐 고민을 하다 입을 여셨다. "이건... 개인적으로 하는 이야기인데, 교회에 완벽한 사람은 없어. 너도 성서와 교리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하니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이건 로마 시대 때부터 그래왔고, 그 사람들끼리 사랑하라고 하는 게 교리잖아. 앞으로 만날 사람들이 많을텐데 그 사람들을 기독교(개신교)라고 걸러버리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의 폭도 좁아질 거고. 네가 이번 일로 화가 난 건 알겠지만, 이번 일 때문에 기독교(개신교) 사람들한테 선입견을 갖게될 것 같아서, 그러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서 하는 이야기야."

 

물론 논리로 따지고 들면 흠이 꽤 있는 말이었다. 내가 그 골수한테 완벽함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으며, 내 이런 생각이 단순히 이 골수 하나만으로 생긴 일은 아니라는 말 등등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논증을 할 일도 아니었지만, 이 분이 그 골수를 두둔한 것도 아니었고.

 

그 일이 있은 후 조금 지나 성경을 다시 파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여러 명의 개신교를 겪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신앙심이 갑자기 든 건 아니었지만. 아, 방금 쓴 골수랑은 그 다음달에 손절했다. 그 뒤에 굉장히 기분이 더러워진 상태였지만, 이상하게 그 강사님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날 그분께 따로 연락을 드렸다.

 

 이후 나는 내 종교 정체성을 개신교로 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나가지 않는. 그렇게 종교는 있지만, 교회 출석은 안 하는 그런 상태로 몇 개월을 살았다. 하도 교회가 많으니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던 그런 마음과 괜히 잘못 들어갔다가 이상한 소리라도 들으면 개신교 자체에 정을 떼버릴 것 같아서 교회 출석을 반 년 정도 미뤘다. 그러다 컴퓨터 수업을 들으러 간 곳에서 독실한 권사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분과 종교 얘기를 하게 되었다. 그 권사님이 다음주 주일에 비신자를 초대해서 전도하는 축제를 한다며 초대해주셔서 그분이 다니시는 예장합동 소속 교회에 잠시 다니게 되었다. 듣기에 이상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 것 같아서 바로 등록 후 다니기 시작했다. 첫날에 차별금지법 반대 서명운동과 1027 연합예배를 독려하는 모습을 보며 "이게 뭐지..?" 싶었지만 나에게 서명이나 참여를 강요하지 않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 후 새가족 수업을 듣는데 몇 번의 뇌절이 왔는지 모르겠다. 창조설을 문자주의적으로 믿는 사람도 있었고, 온갖 행사에 밀려 교회를 두 달이나 다녔지만 수업은 1주차 밖에 나가지 않았다.(6주 과정) 그리고 수업을 듣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다."라는 말 외에 다른 것들은 알려주지 않았다.

 

 이후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니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했다. 그 교회에만 그런 감정을 느꼈다면 교회를 옮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는 그 교회 뿐 아니라 개신교의 예배 방식과 신학, 사상에도 동의하지 못했다.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하나님의 열심>이나 <목적이 이끄는 삶>, <팀 켈러 시리즈>, 칼뱅의 <기독교 강요>, 존 밀턴의 <실낙원>, 존 번연의 <천로역정>,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등 책을 읽어보기는 했지만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와 <실낙원> 외에는 와닿거나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 특히 마틴 로이드 존스나 팀 켈러, 조정민, 유기성 등 개신교에서 자주 읽히는 복음주의자들이 쓴 책들은 아무리 읽어도 적응이 안 되고 납득도 되지 않았다. 교리로 들어가면 더더욱 그런 증상이 심해졌다. 루터의 5솔라, 이신칭의 등 어딘가 동의할 수 없는 교리들을 보면 머리가 아파왔다. 사실 이런 것보다 더 적응 안 되는 건 따로 있었다. 방언기도나 주여삼창, 찬양과 설교만 하는 예배 형태, 예배가 끝난 후 셀모임. 이때는 내가 다시 다닌지 얼마 되지 않아 어색해서 그런 거겠지 생각하며 넘겼다.

 

 하지만 12.3 내란이 발생하며 확실히 생각이 바뀌었다. 다른 종교들은 이에 대해 잘못됐다고 목소리를 내는데, 대부분의 개신교는 이를 옹호하거나 묵인하는 것이다. 그런 모습도 굉장히 기괴했지만 동시에 개신교 자체가 진리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독교 죄악사>, 아프간 피랍 사건, 냉전이 해체되고 공산주의가 거의 없어지다시피 되었지만 여전히 공산주의라는 가상의 적을 만들어 누군가를 정죄하고 혐오하는 데 미쳐있는 신자들, 종교개혁의 진실 등 다시 개신교에 대해 파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례 교회와 개신교를 끊임없이 비교해보며 책과 글, 유튜브 영상 등 다방면의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여러 데이터를 톺아보고 분석한 후 완전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개신교는 신학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나 성경적으로나 맞는 구석이 없다는 것을. 교파들은 수없는 분열과 타락으로 가고 있지, 개교회주의라 교단과의 결속력도 거의 없다고 봐야지, 사도들과 교부들로부터 이어온 부분이 과연 있나 싶고. 그렇다고 바른 목소리를 내거나 사람들에게 대단한 도움을 준다고 보기도 어렵지. 더 이상 내가 이 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그렇게 추린 선택지가 가톨릭, 성공회, 정교회였다. 내가 사는 곳에 성공회 성당이 있기는 했지만 대중교통으로 가기 힘든 곳이고, 정교회 성당은 가려면 제일 가까운 곳이라고 하더라도 차타고 2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하지만 성공회와 정교회에 입교하는 게 그 거리를 감수할 정도로 간절하지는 않았고, 그렇게 추려보니 남은 곳이 가톨릭이었다. 4일 간 개신교에 대한 여러 공부들과 가톨릭 교리와 신학, 미사에 대한 일부의 공부가 끝난 후 가톨릭 성당 출석을 결심하게 되었다.

 

 개종을 결심한 후 우리 지역에 있는 세 개의 본당에 모두 전화해봤다. 당시에는 성당이 속지주의라는 걸 몰랐기 때문에 임의로 '대중교통으로 가기 가장 좋은 순'으로 A, B, C로 순서를 정해보고 하나하나 전화를 걸어봤다. A 본당은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았고, B 본당은 이듬해 3월부터 교리가 시작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당장 예비신자로 등록하고 싶어서 마지막 희망을 갖고 C 본당에 전화를 걸었다. C 본당에서는 이미 수업 진도가 2개월치 넘게 나갔지만, 보충교리 들으면 금방 커버 가능하니 이번 주일에 바로 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해당 주일에 처음으로 가톨릭 성당에 가봤고, 일요일 9시에 하는 예비신자 교리반에 등록 후 수업을 들었다. 교리 수업부터 너무 좋았다. 내가 알고자 했던, 내가 받고자 했던 새가족 수업이 이런 수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수업이 끝난 후 바로 교중미사에 참례했는데, 처음 간 사람이 바로바로 하기에 결코 쉽지 않았다. 겉보기에 이런저런 코멘트가 많아 복잡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바로 이해할 수 없으니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있었다. 개신교보다는 이게 더 맞는 방법이라는 것. 미사 전례의 흐름을 따라가느라 한 달 동안 정신없긴 했지만, 그럼에도 단 한 번도 의미없단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미사에 참례하면 할수록 여기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무엇보다 구약-시편-신약-복음으로 이어져 성경의 많은 부분을 봉독하고 강론이 명료하고 짧으며, 전례마다 여러 유의미한 기도들로 채워져있으니 이게 진정한 예배가 아닌가 생각도 했었다. 특히 나는 성체를 모시는 부분을 제일 좋아했다. 예비신자 시절 성체를 모실 수는 없었지만 그 성체를 보며 나도 빨리 성체를 모셔보고 싶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었다.

 

 지금은 성당에서 도보 3분 거리인 곳으로 이사를 와서 간절함이 떨어지긴 했지만 교리를 들을 당시에 살던 집은 성당과 집의 거리가 좀 있는 편이었다.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버스 편이 얼마 되지도 않아 아침 7시 40분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간 후 그 시내에서 버스를 한 번 더 갈아타고 가야 했다. 그렇게 일찍 나와 9시에 교리 수업을 듣고 10시 반에 교중 미사를 드리면 그날 오전이 거의 다 지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겨울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30분 정도의 거리였던 성당을 매주 다닌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간절했고, 또 교리를 듣고 미사에 참례하는 시간이 즐거워 그걸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개종 후 내 삶에는 많은 즐거움의 요소가 생겼다. 예쁜 묵주를 사서 그것으로 기도하는 즐거움, 미사보 고르는 즐거움, 성당 곳곳의 아름다운 성상과 성화들, 성당을 가득 채우는 오르간 소리가 너무 좋았다. 다양한 미사도 참례했었다. 우연히 알게 된 분의 혼배미사에 참례하기도 했었고, 도미니코 수도회의 성품성사에 참례하기도 했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대축일 미사, 정순택 대주교님이 집전하신 콘클라베 관련 미사와 탄핵 촉구를 위한 시국미사 등 다양한 미사에 참례하면서 나와 같이 있는 신자들이 전부 나와 연결되어 있는 신앙인이라는 것을 느낄 때마다 너무 좋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때는 명동성당에서 만난 싱가포르 분들과 프랑스 분들과 이야기했을 때다. 나라도 다르고, 언어도, 인종도 다르지만 나와 같은 가톨릭 신앙을 믿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때 오가는 그 온화함과 대화들을 좋아했다. 예비신자 교리 수업 외에 본당 견진성사 자료를 준비하면서, 이후 가톨릭 신학책과 팟캐스트를 적극적으로 찾아 읽으면서 2000년 동안 쌓인 신학의 탄탄함에 감탄했다.

 

 세례명 고른 이야기도 해야 겠다. 내가 생각해둔 영세명은 클로틸다, 발렌티나, 마리아 고레티, 알렉산드리아의 가타리나, 아우구스티나, 세실리아였다. 물론 아우구스티나랑 세실리아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바로 빼버렸지만. 그러면 네 개의 선택지가 남는다. 발렌티나는 내 생일과 축일이 같아서 먼저 본 세례명이었는데, 처음에는 끌렸지만 세례 세 달 전에 다시 보니 어딘가 끌리지 않아서 선택지에서 뺐다. 마리아 고레티도 끌렸다. 칼로 자신을 17번 찌른 괴한을 용서한 성녀인데, 그 분의 삶은 존경하지만 나랑은 아닌 것 같아 제외시켰다. 그리고 남은 두 선택지는 클로틸다랑 알렉산드리아의 가타리나. 가타리나 성인의 삶을 보니 내 성향과 비슷한 것 같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이 이름을 써야겠다는 확신이 들지는 않았다. 많이 고민을 했고, 또 기도도 했었던 부분이었는데 결국에 남은 이름은 클로틸다. 지피티한테도 물어보고, 사람들한테도 물어봤지만 결국에 남은 이름은 클로틸다였다. 그렇게 나는 세례 한달 전, 클로틸다로 세례명을 정했다. 

 

 세례명과 대모님이 정해진 후 신부님과 찰고를 했다. 대단한 내용은 아니었다. 인도자가 누구인지, 어떻게 오게 됐는지, 세례명 뭐로 정했는지 정도? 기도문 시험도 그리 빡세지 않았다.

 

 2025년 6월 8일, 성령강림대축일에 세례를 받았고 지금은 언제일지 모를 견진을 기다리고 있다. 개종으로 잃는 무언가도 없었고, 전에 개신교가 너무 불만족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서 더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지만 난 개종 후 너무 만족스럽게 성당에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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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내용을 올리기 전에 나의 묵상 방법을 올려두면 좋을 것 같아 써본다.


📚 묵상이란 무엇인가

묵상이라 하면 사전적 정의로는 특정 대상(종교적 대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을 이른다.
그리스도교에서 묵상이라 하면 보통 성경이나 묵상집을 읽고, 깨닫고(혹은 느끼고) + 그 내용을 기반으로 기도하는 걸 이른다.
 
묵상 유형은 굉장히 다양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묵상법은 대충 이 정도이다.
 
전례교회의 경우, 수도자들의 묵상법인 렉시오 디비나가 있다.

  1. 독서(lectio: 성경 본문을 관찰하고 읽는다.
  2. 묵상(meditatio): 본문을 묵상함
  3. 기도(oratio): 묵상을 바탕으로 기도
  4. 관상(contemplatio): 하느님과의 합일감을 경험하는 단계.

 
개종 전 개신교에서 들은 묵상법도 있었다.
 
1. 읽고 느낀 점을 찾는 묵상법
: 읽기 전 기도나 찬양을 들으며 마음을 정돈한 다음 성경을 읽고 인상적이었던 부분들을 옮겨적고 그 부분을 잡고 기도한다
 
2. 읽는다 -> 애매한 부분은 지피티한테 물어보거나 영어 성경을 참고한다 -> 읽은 뒤 깨달은 부분에 대해 기도한다
 
 
나의 경우 개신교일 때와 개종 초기에는 성경을 읽고, 인상적이었던 부분 밑줄치거나 옮겨 적고 끝났었다.
물론 좋은 말들임은 분명하지만 매번 묵상할 때마다 "이게 맞나...?"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가톨릭으로 개종 후 1년간 가톨릭 신학책(교부학, 마리아론, 교회론, 교리, 성인들의 저작들 등)들을 여러 권 읽으며 공부한 뒤에 이렇게 묵상해선 안 되겠다 싶어 새로운 묵상 방법을 고안해 그 방법대로 올해부터 묵상하고 있다.
 


📚 나의 묵상법

 

1. 무엇을 읽나

묵상 때 쓰는 책

 
원래는 성경책을 놓고 통독을 하는 방식으로 했는데 요즘은 그것보다는 매일미사를 사용하고 있다.
성경책을 통독을 하면 그 구절의 맥락을 파악하기에 좋다는 장점은 있지만, 할당량이 없어 들쭉날쭉 읽게 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나는 매일매일, 부담 안 되는 분량으로 이어가고 싶어 매일미사를 묵상하는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그외 매일미사를 선택한 이유가 몇 가지 더 있다.
 
1. 가톨릭은 미사 때 말씀 전례가 있는데 이때 봉독하는 말씀이 주일 기준으로 가해, 나해, 다해/평일 기준으로 홀수해, 짝수해가 정해져 있다. 올해가 가해이면, 다음해엔 나해, 그 다음해엔 다해 내용으로 미사가 거행된다. 이게 굉장히 잘 짜여있어서 세 해를 한 바퀴 돌리면 성경 한 권을 통독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매일미사를 꾸준히 묵상하면 3년만 해도 성경 1독, 10년 신앙생활 하면 거진 3바퀴는 돌릴 수 있는 거다.
 
2. 미사 내용이 주일 기준 1독서(보통은 구약이고, 가끔 신약 서간이나 묵시록이 나오기도 한다) - 시편 - 2독서(보통 신약 서간을 다룬다) - 복음서 형태로 되어 있다. 평일에는 1독서(구약이나 신약 서간 중 하나를 다룬다) - 시편 - 복음서 형태로 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오늘의 묵상'이라는 부분에서 이 부분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고, 우리가 오늘 말씀 안에 알아야 할 부분을 쉽게 알려준다.
 
3. 중간중간 미사 때 하는 기도 내용들이 끼어 있어 그 형태에 맞춰 기도도 할 수 있다.
 
이렇게 매일 미사에서 오늘 날짜에 맞는 부분을 읽고 묵상을 한다.
 

2. 어떻게 읽나

밑줄친 후 공부한다

 
매일미사를 한 번 정독한 뒤 오늘 포인트가 되는 구절이나 내게 필요한 구절에 밑줄을 친다.
그리고 이 밑줄 내용을 헬라어나 히브리어로 다시 찾아본 후 매일미사에 적는다.
(블로그에 작성할 때는 사이트에서 히브리어/헬라어 원문을 찾아 복붙한다)
 
위 사진에 나온 구절은 루카 복음 2장 19-20절 내용인데, 이 내용을 밑 사이트 중 하나에서 찾아본다.
신약이냐 구약이냐에 따라서 살짝 다른데 신약은 Greek Bible이랑 onlinechapel.goach.org라는 사이트에서 찾아본다.
 

Greek Bible

Thanks for caring! I'll add you to the periodic update list.

www.greekbible.com

 
사이트 자체의 가독성은 여기가 더 좋은 것 같다.

Greek New Testament

[1]Βίβλος γενέσεως ᾿Ιησοῦ Χριστοῦ, υἱοῦ Δαυῒδ υἱοῦ ᾿Αβραάμ. [2]᾿Αβραὰμ ἐγέννησε τὸν ᾿Ισαάκ, ᾿Ισαὰκ δὲ ἐγέννησε τὸν ᾿Ιακώβ, ᾿Ιακ

onlinechapel.goarch.org

이 사이트는 정교회 관련된 분이 운영하는 사이트이다.
텍스트 내용에 차이는 없으니 더 잘 맞는 사이트에서 원문을 찾아보면 된다.
 
그리고 구약은 원어가 히브리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Sefaria: a Living Library of Jewish Texts Online

The largest free library of Jewish texts available to read online in Hebrew and English including Torah, Tanakh, Talmud, Mishnah, Midrash, commentaries and more.

www.sefaria.org

유대교 사이트긴 하지만 구약(타나크)는 유대교랑 같은 텍스트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를 사용하는 편이다.
 
약간 외람된 이야기지만, 이 사이트는 탈무드나 기타 유대교 문헌들에 대한 히브리어 텍스트도 같이 제공한다. 탈무드는 개인적으로 아랍판 논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익한 내용이 많아 종교가 없는 분들도 참고하기 좋은 이야기들이 많다. 또한 그리스도교 신자라 하더라도 깊이 있게 그리스도교를 알려면 유대교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 사이트를 적극 활용해볼 것을 추천한다. 개인적으로는 구약의 파스카-신약의 성만찬&십자가 제사가 이어지는 면이 있기 때문에 
 
본론으로 돌아와서, 왜 알지도 못하는 원어 텍스트를 읽으려고 하는지 궁금해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서 적어본다. 종종 한국어 성경을 읽고 이해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으면 영어 성경을 참고할 것을 권한다. 나도 잘 모를 때는 영어 번역(그걸로도 안될 때는 독일어나 중국어 같은 텍스트도 참고해본 적도 있다)을 본 적이 있긴 하지만, 번역본을 위한 또 다른 번역본을 읽는 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원문을 읽고, 그 번역 과정이 어떻게 되었나를 알아보는 게 훨씬 원의에 더 가까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어떻게 해석하나

구절마다, 내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마다 방식이 조금씩 다르게 적용된다. 나는 보통 세 가지 방법을 사용하는 편이다.

 

1) 매일미사에 나온 <오늘의 묵상> 참고하기

 
 <오늘의 묵상> 파트를 참고한다. 이 파트 중 실천에 필요한 부분과 해석에 필요한 부분에 밑줄을 친다. 이 묵상글은 신부님이 작성하고, 주교회의라는 안전망이 있기 때문에 이단적인 해석을 우려할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나는 이 파트를 순전히 해석을 위해서만 쓰지는 않는다. 단지 오늘 나온 말씀들이 말하고자 하는 맥을 잡을 때와 이 말씀에서 배운 행동강령을 가져가기 위해 사용할 뿐. 
 
 

2) 교부들의 주해 참조하기

 
 이런 부분은 웬만하면 책을 참고하는 편이다. 하지만 책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에는 AI한테 "나는 ~~게 해석했는데 이게 교부들의 주해와 가톨릭 교도권에서 벗어나지 않는 해석인지, 그리고 내가 미처 해석하지 못한 부분을 교부들의 주해와 가톨릭 교도권 해석이 있는지 분석하고 피드백해줘. + 참고문헌 밝혀서 알려줘."라고 묻기도 한다. 가톨릭에서 나온 주석 성경도 있지만, 나는 주석 성경보다는 교부들의 주해를 직접 참고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특히 초기 교부들의 경우, 예수님을 직접 본 제자(사도들)의 제자였거나 그들과 직접적으로 알고 교류하고 공부하셨던 분들이며, 그들의 주해와 증언을 기반으로 지역 교회와 공의회의 정경화 작업이 진행되어 지금의 성경이 나왔기 때문이다. 
 
보통 이 두 권 중 하나를 참고하는 편인데, 해석 방법은 이렇다.
 

교부들의 가르침 3

그리스도의 육화-마리아 (교부 문헌 주제별 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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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성경주해 29권세트

※ 군부대 및 우체국사서함 배송지로는 택배발송이 불가합니다. (CJ대한통운 택배 수령이 가능한 주소로 주문해주세요.)이로 인한 반송시 왕복택배비 6,500원이 부과되오니 양해바랍니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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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요한묵시록 13장 18절 내용을 해석한다고 해보자.
 

"여기에 지혜가 필요한 까닭이 있습니다. 지각이 있는 사람은 그 짐승을 숫자로 풀이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그 숫자는 육백육십육입니다."

 
이 내용을 글로 읽어서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런 내용을 해석할 때 교부들의 해석을 참고해 해석하는 편이다.
이 책에 의하면 이 구절에 대한 교부들의 주해는 이렇다.
 

  •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묵시록 주해>: 거룩한 책에는 그리스도의 적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다. 진실한 사람들에게는 시간과 경험이 그 이름의 뜻을 드러내줄 것이다. 
    • 진실한 사람들에게는 시간과 경험이 그 수의 진정한 뜻과 그에 관해 쓰인 말들이 진실을 드러내 줄 것입니다. 일부 교사들이이 이야기하듯이, 우리가 확실한 이름을 알 필요가 있다면 환시자가 그것을 알려 주었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은총은 그 파괴자의 이름이 거룩한 책에 담기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 존자 베다, <묵시록 주해>: 육백육십육이라는 수는 성취와 완성을 암시한다
    • 또 다른 해석은 이렇습니다. 세상이 창조되는 데 걸린 날의 수인 여섯이 완성된 일을 상징한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있습니까?
    • 이 수가 그 자체만으로 십 또는 백을 곱한 형태로나, 똑같은 완전함의 열매가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가 됨을 나타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 "한 해 동안 솔로몬에게 들어온 금의 무게는 육백육십육 탈렌트"(1열왕 10,14)였습니다.
    • 그래서 유혹자인 이 압제자는 마땅히 참된 임금의 몫으로 그분께서 받으셔야 할 세금을 거두려 할 것입니다.
  • 프리마시우스
    • 한편 그리스인들의 계산법에 따라 그 이름을 알아낼 수도 있을 법하다. 
    • 그리스도의 적은 하느님의 몫인 영예를 탈취하고 참그리스도를 부정할 것이므로, 안테모스나 아르누메 같은 이름도 이 수에 해당한다. 
  • 오이쿠메니우스 <묵시록 주해>: 많은 수치스러운 이름과 직함이 이 수에 해당하지만, 그리스도의 적은 수치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매우 좋아할 것입니다.
    • 그자는 이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조금도 수치스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기까지 할 터인데, 그것은 그가 스스로를 이런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수치스러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현명한 사도는 이런 사악하고 천한 선택을 조롱하며 이런 자들은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필리 3, 19) 산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이름이 그자에게 해당하니, 누구든 원하는 사람은 그 저주받을 자에게 적절한 이름을 붙일 권리가 있습니다.
  • 이레네우스, <이단반박>
    • 모든 배반과 사악함이 응집된 자
      • 그 짐승이 오면, 그의 안에는 온갖 종류의 불의와 속임수의 요체가 들어 있습니다. 그자 안으로 흘러 들어가 담긴 모든 배반적 권능이 불의 용광로로 보내지려고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이에 어울리게 그의 이름은 육백육십육이라는 숫자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가 대홍수 이전에 천사들의 배반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사악함의 모든 혼합물을 자신 안에 끌어 모으기 때문입니다.
      • 노아의 세대는 그때까지 산 모든 인간 가운데 가장 사악한 세대였던 까닭에 땅에 대홍수가 나 완고한 세상을 쓸어 버렸고, 그때 노아는 육백 살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적도 이와 같이 대홍수 이후에 만들어진 우상들의 모든 오류와 예언자들을 죽이고 의로운 이들을 베어 버린 일 등을 다 자기 안에 담고 있는 자입니다.
      • 네부카드네자르가 세운 우상은 실제로 예순 암마 높이였고, 너비는 여섯 암마였습니다. 히난야와 아자르야, 미사엘이 그 상에 경배하지 않아 불가마에 던져진 일(다니엘 3장)은 종말의 시간이 다가올 때 의로운 이들에게 닥칠 분노를 시사하는 예언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 상은 전체적인 시각에서 볼 때, 오직 자기만이 모든 사람의 경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 인간의 도래를 예시합니다.
      • 그런즉 배반 때문에 홍수가 일어난 시대에 살았던 나이 육백 살과 이 의로운 사람들이 불가마에 던져기게 한 금상의 암마 수야말로 육천 년 간의 모든 배반과 불의의 시악함과 거짓 예언과 속임수가 응집되어 있는 인간의 이름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 이레네우스는 이 숫자가 616으로 되어 있는 사본들이 있는 것을 알았지만 그건 잘못 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음.
    • 그리스도의 적의 이름(이레네우스의 <이단반박>)
      • 그러므로 추정을 하고 보이는 이름마다 맞춰보며 애쓰기보다는 예언적 성취를 기다리는 편이 한결 확실하고 위험도 적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숫자를 지닌 것으로 계산되는 이름이 많다 보니 결국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 남습니다. 그런데 이 숫자를 지닌 이름이 많지만, 장차 올 인간이 그 이름들 가운데 어느 이름을 지니고 있을 것인가 하고 우리는 묻게 됩니다.
      •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 이름의 숫자를 지닌 이름을 꼭 알아야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진리에 대한 열정 때문입니다. 
      • 숫자로 풀면 육백육십육인 이름들은 있음.
      • 테이탄은 이 수에 각별히 들어맞는 듯하다. 그리스도의 적은 흉포하며 자신의 왕이 존귀함을 지녔다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적의 이름을 단정하는 위험한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현세에 분명히 드러날 필요가 있다면 묵시록의 환시를 본 이가 알려 주었을 테니까요.
      • 히폴리투스도 대체로 이레네우스의 이런 논증을 따랐지만 라티누스라는 이름에 가능성을 두는 것 같다.

 
이런 경우 나는 주해를 전부 메모한 후, 핵심 요지를 몇 가지 문장으로 이런 식으로 요약하고 코멘트를 넣는 하는 편이다.
 
요약 + 개인 코멘트

  • 이름을 여러 계산법으로 그리스도의 적의 이름이 무엇인지 여러 추측은 해볼 수 있으나, 필요하면 알려줬을 것이니 추측을 하기 보다는 예언적 성취를 기다리기 -> 숫자로 추측하기보다 신앙의 분별과 인내가 필요
  • 성취를 상징하는 숫자: 세상을 창조한 날(6), 솔로몬의 황금은 666탈렌트(1열왕 10, 14)
  • 그리스도의 적은 수치스러운 이름을 붙여도 즐거워할 것 -> 수치가 수치로 느껴지지 않는 상태가 바로 타락이다. 그래서 나는 내 안의 ‘수치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습관을 경계해야 한다.

 
 
 
 

3) 원어 텍스트 + 원어 사전 + AI 툴 활용하기

 
이제 성경을 읽다보면 한국어로 혹은 영어, 라틴어로만 읽기에는 해석에 한계가 오는 구절도 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장 1절을 해석해보자.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한국어 텍스트 영어 텍스트 라틴어 텍스트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중략)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2)He was in the beginning with God.

3) All things came to be through him, and without him nothing came to be. What came to be

(중략)

14) And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and we saw his glory, the glory as of the Father’s only Son, full of grace and truth.
1) In principio erat Verbum, et Verbum erat apud Deum, et Deus erat Verbum.

2) Hoc erat in principio apud Deum.

3) Omnia per ipsum facta sunt, et sine ipso factum est nihil, quod factum est;

(중략)

14) Et Verbum caro factum est et habitavit in nobis; et vidimus gloriam eius, gloriam quasi Unigeniti a Patre, plenum gratiae et veritatis.

 

이렇게 세 언어로 보면 말씀 = word = verbum으로 번역된다.

그럼 이런 질문에 닿게 된다. 그럼 여기서 말씀(=word, verbum)은 무엇인가?

1) (성경) 말씀?

2) 단어?

 

둘 다 아니다.

정답은 헬라어 성경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그리스어(원어) 텍스트
1) Ἐν ἀρχῇ ἦν  λόγος, καὶ  λόγος ἦν πρὸς τὸν θεόν, καὶ θεὸς ἦν  λόγος.
2) οὗτος ἦν ἐν ἀρχῇ πρὸς τὸν θεόν.
3) πάντα δι'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καὶ χωρὶς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οὐδὲ ἕν.  γέγονεν
(중략)
14) Καὶ  λόγος σὰρξ ἐγένετο καὶ ἐσκήνωσεν ἐν ἡμῖν, καὶ ἐθεασάμεθα τὴν δόξαν αὐτοῦ, δόξαν ὡς μονογενοῦς παρὰ πατρός, πλήρης χάριτος καὶ ἀληθείας.
 
로고스(λόγος)라는 말은 단어라는 뜻 이외에 이성의 원리(진리), 만물의 원천이자 원리와 같은 뜻들도 포함된다. 나아가 성서학에서 로고스는 하느님의 자기계시/자기표현(λόγος)이 ‘인격’이 되신 분(성자)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λόγος는 단순한 문자나 언어가 아니라, 창조와 계시에 관여하시는 하느님의 성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성/원리’ 같은 의미 영역은 그분이 만물의 질서와 진리의 근원이라는 점을 비춰주는 부차적 뉘앙스다.
 
이 구절을 "성경은 곧 하나님"이라고 해석한 개신교인을 본 적이 있는데, 이건 굉장히 잘못된 해석이다. 특히, 말씀을 성경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이유는 3절과 14절 때문이다.
 
2-3절에서 이미 로고스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이 다 되어 있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 여기서 ‘그분’은 성부와 함께 계시며(구별), 창조에 참여하시는(매개) 성자(λόγος)를 가리킨다.
 
14절을 보면 로고스(λόγος)가 책이 되었다고 나오지 않으며, 육화(사람이 되시어) 사람들 속에 사셨다는 표현을 볼 때 이 '만물의 원천이자 원리/하느님의 자기계시'께서 사람들에게 내려와 사셨다고 해야 원의에 더욱 맞는 해석이 된다.
 
 
이 말씀을 해석할 때 나는 AI에 "여기서 λόγος가 어떤 걸 뜻하는지 요한이 전하고자 했던 그 원의에 맞는지, 교부학적으로 맞게 해석이 되는지 알려줘. 해석을 할 때는 문헌학적인 부분까지 참조해서 해석했으면 좋겠어." 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 답안을 읽은 후 내가 잘 찾은 게 맞는지 관련 문헌을 다시 읽어보거나 그리스어 사전(네이버 그리스어 사전/시카고 대학 그리스어 사전 사이트)에 나온 풀이를 지피티 해석과 대조해본 후 해석을 마무리짓는다.
 

NAVER Ancient Greek Dictionary

NAVER Ancient Greek Dictionary service, Today's Word, Special Character Input

dict.naver.com

 
 

https://logeion.uchicago.edu/

logeion.uchicago.edu

 
 

4. 오늘 묵상한 내용을 어떻게 정리하나

이렇게 묵상한 내용을 블로그에 형식을 갖춰 적는다.
 

1) 매일미사 사이트에서 오늘 매일미사 텍스트 전체를 복사+붙여넣기 한 후, 묵상 때 밑줄쳤던 부분들에 하이라이트를 넣어 준다. 

 

2026년 01월 01일 목요일

[백]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세계 평화의 날)

교회는 1월 1일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를 뜻하는 ‘천주의 성모’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부여한 것은 에페소 공의회(431년)이다. 지역마다 서로 다른 날짜에 기념해 오던 이 축일은 에페소 공의회 1500주년인 1931년부터 보편 교회의 축일이 되었고, 1970년부터 모든 교회에서 1월 1일에 지내고 있다. 또한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1968년에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세계 평화의 날’로 정함에 따라 교회는 이후 해마다 이를 기념하고 있다.

오늘 전례 

오늘은 새해 첫날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새해 첫날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냅니다. 올해도 우리 신앙의 모범이신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하고, 세계 평화를 기원하며 성모님의 전구를 청합시다.

입당송 

거룩하신 어머니, 찬미받으소서. 당신은 하늘과 땅을 영원히 다스리시는 임금님을 낳으셨나이다.
<또는>
이사 9,1.5; 루카 1,33 참조
오늘 우리 위에 빛이 비치고, 주님이 우리에게 태어나셨네. 주님은 놀라운 하느님, 평화의 임금님, 영원한 아버지라 불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라.

본기도 

하느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출산을 통하여
인류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으니
언제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시는 성모 마리아의 전구로
저희가 생명의 근원이신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6,22-27
22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24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25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26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시편 67(66),2-3.5.6과 8(◎ 2ㄱ)

◎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고 저희에게 복을 내리소서.
○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고 저희에게 복을 내리소서. 당신 얼굴을 저희에게 비추소서. 당신의 길을 세상이 알고, 당신의 구원을 만민이 알게 하소서. ◎
○ 당신이 민족들을 올바로 심판하시고 세상의 겨레들을 이끄시니, 겨레들이 기뻐하고 환호하리이다. ◎
○ 하느님, 민족들이 당신을 찬송하게 하소서.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찬송하게 하소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세상 끝 모든 곳이 그분을 경외하리라. ◎

제2독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셨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4,4-7
형제 여러분, 4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5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6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7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히브 1,1-2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이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네.
◎ 알렐루야.

복음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 뒤 그 아기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6-21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16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17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18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19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20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21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모든 복의 샘이신 주님, 새로운 한 해를 맞는 교회를 굽어살펴 주시어, 주님께 감사드리고 주님을 찬미하며 온 세상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2.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정의의 주님, 국가 간의 교류가 많아진 이 세상을 살펴 주시어, 자국의 이익 때문에 다른 나라를 공격하거나 인권을 무시하는 일이 없게 하시고, 정의를 실현하며 평화의 길로 나아가게 하소서.

3. 난임과 불임으로 고통받는 부부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생명이신 주님, 난임과 불임으로 고통받는 부부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자녀 출산의 은총을 주시고, 비윤리적인 보조 생식술의 유혹 앞에서 생명 존중의 길을 먼저 생각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4.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자비의 주님, 시노드 이행 단계를 보내고 있는 저희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를 굽어살피시어, 성령 안에서 귀 기울이고 만나고 대화하고 식별하며 함께 걸어가게 하소서.

예물 기도 

하느님,
온갖 좋은 일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니
저희가 즐거운 마음으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며
새 시대를 열어 주신 하느님의 은총을 찬양하고
그 은총의 완성을 기뻐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복되신 동정 마리아 감사송 1 : 어머니이신 마리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하고
복되신 평생 동정 마리아 ( ) 축일에
아버지를 찬송하고 찬양하고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성모님께서는 성령으로 외아들을 잉태하시고
동정의 영광을 간직한 채
영원한 빛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낳으셨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사들이 주님의 위엄을 찬미하고
주품천사들이 흠숭하며 권품천사들이 두려워하고
하늘 위 하늘의 능품천사들과 복된 세라핌이
다 함께 예배하며 환호하오니
저희도 그들과 소리를 모아 삼가 주님을 찬양하나이다.

영성체송 히브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시다.

영성체 후 묵상 

새해 첫날 우리도 이렇게 서로 축복합시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즐거운 마음으로 천상 성사를 받고 비오니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를
성자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는 저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오늘 우리는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냅니다. 오늘은 또한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성모님의 축일인 오늘, 전쟁이 없기를 바라는 것을 넘어 더 넓은 의미의 진정한 평화를 얻으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성모님의 모습을 떠올려 봅시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8-19). 메시아에 관한 소식을 들은 모든 이가 놀라워할 때, 성모님께서는 조용히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시고 곰곰이 되새기셨습니다.
참된 평화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곧 마음의 평화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먼저 하느님 사랑 안에서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분심이 아닌 차분한 마음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왜 메시아께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는지’를 깊이 묵상할 때, 참된 평화가 마음에서 비롯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맑은 눈동자에서 전해지는 순수함과 성모님의 사랑 가득한 미소 속에서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새해에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 속에서, 주님 사랑의 온기를 우리 주변에 널리 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철구 요셉 신부)

 
 

2) 묵상 말씀 중 해석할 부분에 대한 그리스어 텍스트와 해석을 공부한 후 같이 메모한다.

 
18) καὶ πάντες οἱ ἀκούσαντες ἐθαύμασαν περὶ τῶν λαληθέντων ὑπὸ τῶν ποιμένων πρὸς αὐτούς·
19)  δὲ Μαριὰμ πάντα συνετήρει τὰ ῥήματα ταῦτα συμβάλλουσα ἐν τῇ καρδίᾳ αὐτῆς.
 
- συνετήρει(συντηρέω): 미완료 과거(impf.) 직설법 능동 3인칭 단수 형태다. → “한 번 저장했다”가 아니라, 계속/반복적으로 간직하고 있었다고 해석해야 맞음.
- καρδίᾳ: 사람의 지식, 감정, 의지 등의 정신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
- συμβάλλουσα: 곱씹다, 맞추다, 함께 던지다, 맞대어보다, 조합하다, 종합하다
 
-> 마음에 두고두고 맞대어보며 반복적으로 되새겼다고 해야 원의에 더 맞는 해석이 됨.
 
 

3) 오늘의 묵상 내용 중 필요한 부분을 메모한 후, 이걸 어떻게 내 삶에 적용할까 생각해본 후 코멘트를 적는다.
 

  • 더 넓은 의미의 진정한 평화란?: 마음에서 시작되는 참된 평화 -> 주님 사랑의 온기를 주변에 널리 전하기
  • 평화로운 마음을 갖는 법
    • 성모님처럼 조용히 마음속에 간직하고 되새긴다
    • 하느님 사랑 안에서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차분한 마음으로 세상 바라보기
  •  우리의 목표: 주님이 주시는 평화 속에서 주님 사랑의 온기를 우리 주변에 널리 전하기
    • 실천 방법은?
      • 내 마음을 먼저 평화로이 하기
        • 왜 내 마음은 평화롭지 못할까 생각해보기
        •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가지며 좋아하는 것들을 하기
        • 평화를 줄 수 있는 성경 말씀 묵상이나 성인전 읽기
        • 경당에 가서 성체조배하기
        • 이번주에 누군가를 미워했던 부분에 대해 고해성사 하기
      •  가족들에게 따뜻하게 대하기
      • 2차 헌금(후원이 필요한 단체나 이웃에게 전액 기부되는 헌금) 액수 늘리기

 
 


 

이렇게 나의 묵상 방법에 대해 적어봤다.

올바른 방향으로만 갈 수 있다면야 묵상 방법에 100% 정답은 없지만, 나는 앞으로 이런 방식으로 할 것 같다.

 

국립공주박물관 아카이빙.pdf
4.23MB

 

Lana Del Rey - Fine China

 

Lana Del Rey - Kintsugi

 

사실 내 영감의 원천은 라나 델 레이였음 ^^,,

다음엔 K-Ceramic으로 노래 내주면 안 됨?

하 너무 좋아 ㅜ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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