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단락을 보고 그 강사님이 잠깐 고민을 하다 입을 여셨다. "이건... 개인적으로 하는 이야기인데, 교회에 완벽한 사람은 없어. 너도 성서와 교리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하니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이건 로마 시대 때부터 그래왔고, 그 사람들끼리 사랑하라고 하는 게 교리잖아. 앞으로 만날 사람들이 많을텐데 그 사람들을 기독교(개신교)라고 걸러버리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의 폭도 좁아질 거고. 네가 이번 일로 화가 난 건 알겠지만, 이번 일 때문에 기독교(개신교) 사람들한테 선입견을 갖게될 것 같아서, 그러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서 하는 이야기야."
물론 논리로 따지고 들면 흠이 꽤 있는 말이었다. 내가 그 골수한테 완벽함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으며, 내 이런 생각이 단순히 이 골수 하나만으로 생긴 일은 아니라는 말 등등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논증을 할 일도 아니었지만, 이 분이 그 골수를 두둔한 것도 아니었고.
그 일이 있은 후 조금 지나 성경을 다시 파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여러 명의 개신교를 겪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신앙심이 갑자기 든 건 아니었지만. 아, 방금 쓴 골수랑은 그 다음달에 손절했다. 그 뒤에 굉장히 기분이 더러워진 상태였지만, 이상하게 그 강사님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날 그분께 따로 연락을 드렸다.
이후 나는 내 종교 정체성을 개신교로 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나가지 않는. 그렇게 종교는 있지만, 교회 출석은 안 하는 그런 상태로 몇 개월을 살았다. 하도 교회가 많으니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던 그런 마음과 괜히 잘못 들어갔다가 이상한 소리라도 들으면 개신교 자체에 정을 떼버릴 것 같아서 교회 출석을 반 년 정도 미뤘다. 그러다 컴퓨터 수업을 들으러 간 곳에서 독실한 권사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분과 종교 얘기를 하게 되었다. 그 권사님이 다음주 주일에 비신자를 초대해서 전도하는 축제를 한다며 초대해주셔서 그분이 다니시는 예장합동 소속 교회에 잠시 다니게 되었다. 듣기에 이상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 것 같아서 바로 등록 후 다니기 시작했다. 첫날에 차별금지법 반대 서명운동과 1027 연합예배를 독려하는 모습을 보며 "이게 뭐지..?" 싶었지만 나에게 서명이나 참여를 강요하지 않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 후 새가족 수업을 듣는데 몇 번의 뇌절이 왔는지 모르겠다. 창조설을 문자주의적으로 믿는 사람도 있었고, 온갖 행사에 밀려 교회를 두 달이나 다녔지만 수업은 1주차 밖에 나가지 않았다.(6주 과정) 그리고 수업을 듣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다."라는 말 외에 다른 것들은 알려주지 않았다.
이후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니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했다. 그 교회에만 그런 감정을 느꼈다면 교회를 옮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는 그 교회 뿐 아니라 개신교의 예배 방식과 신학, 사상에도 동의하지 못했다.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하나님의 열심>이나 <목적이 이끄는 삶>, <팀 켈러 시리즈>, 칼뱅의 <기독교 강요>, 존 밀턴의 <실낙원>, 존 번연의 <천로역정>,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등 책을 읽어보기는 했지만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와 <실낙원> 외에는 와닿거나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 특히 마틴 로이드 존스나 팀 켈러, 조정민, 유기성 등 개신교에서 자주 읽히는 복음주의자들이 쓴 책들은 아무리 읽어도 적응이 안 되고 납득도 되지 않았다. 교리로 들어가면 더더욱 그런 증상이 심해졌다. 루터의 5솔라, 이신칭의 등 어딘가 동의할 수 없는 교리들을 보면 머리가 아파왔다. 사실 이런 것보다 더 적응 안 되는 건 따로 있었다. 방언기도나 주여삼창, 찬양과 설교만 하는 예배 형태, 예배가 끝난 후 셀모임. 이때는 내가 다시 다닌지 얼마 되지 않아 어색해서 그런 거겠지 생각하며 넘겼다.
하지만 12.3 내란이 발생하며 확실히 생각이 바뀌었다. 다른 종교들은 이에 대해 잘못됐다고 목소리를 내는데, 대부분의 개신교는 이를 옹호하거나 묵인하는 것이다. 그런 모습도 굉장히 기괴했지만 동시에 개신교 자체가 진리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독교 죄악사>, 아프간 피랍 사건, 냉전이 해체되고 공산주의가 거의 없어지다시피 되었지만 여전히 공산주의라는 가상의 적을 만들어 누군가를 정죄하고 혐오하는 데 미쳐있는 신자들, 종교개혁의 진실 등 다시 개신교에 대해 파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례 교회와 개신교를 끊임없이 비교해보며 책과 글, 유튜브 영상 등 다방면의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여러 데이터를 톺아보고 분석한 후 완전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개신교는 신학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나 성경적으로나 맞는 구석이 없다는 것을. 교파들은 수없는 분열과 타락으로 가고 있지, 개교회주의라 교단과의 결속력도 거의 없다고 봐야지, 사도들과 교부들로부터 이어온 부분이 과연 있나 싶고. 그렇다고 바른 목소리를 내거나 사람들에게 대단한 도움을 준다고 보기도 어렵지. 더 이상 내가 이 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그렇게 추린 선택지가 가톨릭, 성공회, 정교회였다. 내가 사는 곳에 성공회 성당이 있기는 했지만 대중교통으로 가기 힘든 곳이고, 정교회 성당은 가려면 제일 가까운 곳이라고 하더라도 차타고 2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하지만 성공회와 정교회에 입교하는 게 그 거리를 감수할 정도로 간절하지는 않았고, 그렇게 추려보니 남은 곳이 가톨릭이었다. 4일 간 개신교에 대한 여러 공부들과 가톨릭 교리와 신학, 미사에 대한 일부의 공부가 끝난 후 가톨릭 성당 출석을 결심하게 되었다.
개종을 결심한 후 우리 지역에 있는 세 개의 본당에 모두 전화해봤다. 당시에는 성당이 속지주의라는 걸 몰랐기 때문에 임의로 '대중교통으로 가기 가장 좋은 순'으로 A, B, C로 순서를 정해보고 하나하나 전화를 걸어봤다. A 본당은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았고, B 본당은 이듬해 3월부터 교리가 시작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당장 예비신자로 등록하고 싶어서 마지막 희망을 갖고 C 본당에 전화를 걸었다. C 본당에서는 이미 수업 진도가 2개월치 넘게 나갔지만, 보충교리 들으면 금방 커버 가능하니 이번 주일에 바로 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해당 주일에 처음으로 가톨릭 성당에 가봤고, 일요일 9시에 하는 예비신자 교리반에 등록 후 수업을 들었다. 교리 수업부터 너무 좋았다. 내가 알고자 했던, 내가 받고자 했던 새가족 수업이 이런 수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수업이 끝난 후 바로 교중미사에 참례했는데, 처음 간 사람이 바로바로 하기에 결코 쉽지 않았다. 겉보기에 이런저런 코멘트가 많아 복잡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바로 이해할 수 없으니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있었다. 개신교보다는 이게 더 맞는 방법이라는 것. 미사 전례의 흐름을 따라가느라 한 달 동안 정신없긴 했지만, 그럼에도 단 한 번도 의미없단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미사에 참례하면 할수록 여기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무엇보다 구약-시편-신약-복음으로 이어져 성경의 많은 부분을 봉독하고 강론이 명료하고 짧으며, 전례마다 여러 유의미한 기도들로 채워져있으니 이게 진정한 예배가 아닌가 생각도 했었다. 특히 나는 성체를 모시는 부분을 제일 좋아했다. 예비신자 시절 성체를 모실 수는 없었지만 그 성체를 보며 나도 빨리 성체를 모셔보고 싶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었다.
지금은 성당에서 도보 3분 거리인 곳으로 이사를 와서 간절함이 떨어지긴 했지만 교리를 들을 당시에 살던 집은 성당과 집의 거리가 좀 있는 편이었다.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버스 편이 얼마 되지도 않아 아침 7시 40분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간 후 그 시내에서 버스를 한 번 더 갈아타고 가야 했다. 그렇게 일찍 나와 9시에 교리 수업을 듣고 10시 반에 교중 미사를 드리면 그날 오전이 거의 다 지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겨울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30분 정도의 거리였던 성당을 매주 다닌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간절했고, 또 교리를 듣고 미사에 참례하는 시간이 즐거워 그걸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개종 후 내 삶에는 많은 즐거움의 요소가 생겼다. 예쁜 묵주를 사서 그것으로 기도하는 즐거움, 미사보 고르는 즐거움, 성당 곳곳의 아름다운 성상과 성화들, 성당을 가득 채우는 오르간 소리가 너무 좋았다. 다양한 미사도 참례했었다. 우연히 알게 된 분의 혼배미사에 참례하기도 했었고, 도미니코 수도회의 성품성사에 참례하기도 했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대축일 미사, 정순택 대주교님이 집전하신 콘클라베 관련 미사와 탄핵 촉구를 위한 시국미사 등 다양한 미사에 참례하면서 나와 같이 있는 신자들이 전부 나와 연결되어 있는 신앙인이라는 것을 느낄 때마다 너무 좋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때는 명동성당에서 만난 싱가포르 분들과 프랑스 분들과 이야기했을 때다. 나라도 다르고, 언어도, 인종도 다르지만 나와 같은 가톨릭 신앙을 믿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때 오가는 그 온화함과 대화들을 좋아했다. 예비신자 교리 수업 외에 본당 견진성사 자료를 준비하면서, 이후 가톨릭 신학책과 팟캐스트를 적극적으로 찾아 읽으면서 2000년 동안 쌓인 신학의 탄탄함에 감탄했다.
세례명 고른 이야기도 해야 겠다. 내가 생각해둔 영세명은 클로틸다, 발렌티나, 마리아 고레티, 알렉산드리아의 가타리나, 아우구스티나, 세실리아였다. 물론 아우구스티나랑 세실리아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바로 빼버렸지만. 그러면 네 개의 선택지가 남는다. 발렌티나는 내 생일과 축일이 같아서 먼저 본 세례명이었는데, 처음에는 끌렸지만 세례 세 달 전에 다시 보니 어딘가 끌리지 않아서 선택지에서 뺐다. 마리아 고레티도 끌렸다. 칼로 자신을 17번 찌른 괴한을 용서한 성녀인데, 그 분의 삶은 존경하지만 나랑은 아닌 것 같아 제외시켰다. 그리고 남은 두 선택지는 클로틸다랑 알렉산드리아의 가타리나. 가타리나 성인의 삶을 보니 내 성향과 비슷한 것 같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이 이름을 써야겠다는 확신이 들지는 않았다. 많이 고민을 했고, 또 기도도 했었던 부분이었는데 결국에 남은 이름은 클로틸다. 지피티한테도 물어보고, 사람들한테도 물어봤지만 결국에 남은 이름은 클로틸다였다. 그렇게 나는 세례 한달 전, 클로틸다로 세례명을 정했다.
세례명과 대모님이 정해진 후 신부님과 찰고를 했다. 대단한 내용은 아니었다. 인도자가 누구인지, 어떻게 오게 됐는지, 세례명 뭐로 정했는지 정도? 기도문 시험도 그리 빡세지 않았다.
2025년 6월 8일, 성령강림대축일에 세례를 받았고 지금은 언제일지 모를 견진을 기다리고 있다. 개종으로 잃는 무언가도 없었고, 전에 개신교가 너무 불만족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서 더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지만 난 개종 후 너무 만족스럽게 성당에 다니고 있다.